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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명(任命)은 원래 우리말이 아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요 2022. 7. 23.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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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성석린고신왕지. 고신은 조선시대 임명장이다. <국가문화유산포털>

     

    임명(任命)의 의미

    국가조직이나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어떤 직책을 맡기는 행위를 임명(任命)이라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임명은 '일정한 지위나 직무를 남에게 맡김'이라고 하였다. 반대말은 해임(解任)이다. 임명이라는 낱말은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다. 특히 나는 내가 공부하는 영역 덕분에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임명이라는 낱말을 쓰고 또 말해왔다. 별 생각없이 써오던 낱말인데, 최근에 임명이라는 낱말이 일제의 잔재일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그럴까?

     

    먼저 가장 쉬운 방법으로 일본어사전을 검색해보았다. 과연 일본어에도 任命(にんめい)이라는 낱말이 있었다. 한국어의 임명과 의미도 같았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찾아보니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에 처음 임명이라는 말을 찾을 수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보니 정말 임명이 일제의 잔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 옆을 보니 중국어사전에도 任命(rènmìng)이 있었다. 중국어에서 임명 역시 한국어,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같은 의미였다. 심지어 베트남어사전에도 任命(nhiệm mệnh)이 있었다. 그렇다면 임명은 일제의 잔재가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문화권에서 두루 쓰였던 말이었을까?

     

    적어도 조선시대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임명

     

    만약 임명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두루 쓰인 낱말이었다면, 다시 말해, 임명이 한자, 한문에서 나온 개념이라면, 조선시대에도 임명 용례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료에서 임명을 지금의 의미로 사용한 사례는 찾을 수 없다. 任命이라는 표현이 때때로 글 중간에 나오기는 하지만, '운명에 맡긴다', '하늘에 맡긴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제 의심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다. 바로 일본 막부 및 일제가 당대 이른바 서구 열강의 각종 서적들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임명이라는 낱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학술 용어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 번역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임명 역시 이와 같은 종류라면 그것을 재수입한 한국, 중국, 베트남 등에서 자연스럽게 임명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였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가설에 불과하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임명을 지금 의미대로 처음 쓴 한국어 글부터 찾아야 하는 등 지루한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학 논문에서 임명을 대체할 수 있을까 

    새삼스레 확인한 사실은 조선시대에 '일정한 지위나 직무를 남에게 맡김'을 가리킬 때 임명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임명이 워낙 널리 쓰이고 있으므로 역사학 연구자가 책이나 논문에 임명을 임명이라고 쓴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사료에 없는 낱말을 이용해 당시를 설명 혹은 묘사하려는 행위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불편하다. 이미 임명이라는 낱말을 의식한 순간부터 임명을 활자로 옮기는 일은 나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임명과 비슷한 의미로, 제수(除授), 수직(受職, 授職)과 같은 낱말을 사용하였다. 둘 다 의미로 볼 때 임명을 대체할 수 있지만 문제가 있다. 제수는 이전 지위나 직무의 교체를 전제한 표현이다. 그래서 처음 지위가 부여될 때는 쓰기 적합하지 않다. 수직은 지위를 부여하는 사람 입장에서 쓸 때(授職), 지위를 부여받는 사람 입장에서 쓸 때(受職)로 나누어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글로 쓰면 그 장점이 오히려 단점이 된다. 역사학 논문조차 한자 표기를 최대한 줄여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은 치명적인 단점이다. 무엇보다도 둘 다 지금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낱말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당장은 기능적으로 이렇게 쓸 수 있겠다. 이번 논문에서는 수직을 한 가지 의미로 쓰겠다고 정리하고 글을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직(授職)을 선택했다고 하면, 그 논문에서는 지위를 부여하는 사람 입장에서 수직을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가독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면서 굳이 임명 대신 다른 낱말을 쓰는 장점, 의미, 가치 등을 학술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도 일단 글을 쓸 때 생겨나는 내 불편한 마음은 조금 가시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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