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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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값비싼 은 조각을 보지 못하였소?" 세종대 은 조각 사기 사건하루실록 2020. 7. 19. 00:46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인터넷 공간의 밈(meme)이 있듯,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그 욕심을 이용한 사기가 항상 존재했다. 세종 8년(1426) 4월 경오일(7일) 기사에는 사노비 박막동(朴莫同), 악공(樂工) 최대평(崔大平), 일반 백성 김유(金宥), 이 세 명이 짜 놓았던 기가 막힌 사기 범죄 내용이 실려 있다. 먼저 납으로 금속 조각을 하나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길 한가운데 버려둔다. 지나가던 사람들 대부분은 떨어진 금속 조각을 당연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얼른 자기 짐바리에 넣는다. 언뜻 큰 범죄처럼 상상될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 보면 마치 5만 원 지폐 하나를 아무도 없는 길에서 발견하고 손에 넣은 일과 비슷할 것이다. 지나가던 사람, 여기서는 A라고 하자.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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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담을 넘은 승려 은수(誾修)와 조선 왕실의 불교하루실록 2020. 6. 11. 02:03
조선 중종 34년(1539) 5월 정해(20일)에 내관(內官)이 아침에 복분자를 수확하려고 궁궐 후원에 들어갔다가 외성(外城)과 담장(內墻) 사이에 숨어 있는 승려 한 명을 발견했다. 한양 도성도 밤이 되면 함부로 통행할 수 없는데, 도성 안 궁궐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그러므로 당연히 출입허가도 받지 않은 승려가 발견된 것이다.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잡아서 조사해보니 그는 은수(誾修)라는 승려였다. 당연히 은수가 대체 왜 궁궐에 들어왔고, 또 지금까지 남아 있었는지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조사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은수는 조사 과정에서 매를 버티지 못해 죽었고, 도대체 왜 은수가 궁궐에 들어와 있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은수는 몇 번이나 자백했지만, 그 자백 내용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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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南在)가 선택한 세 명의 왕하루실록 2020. 6. 1. 20:26
남재(南在, 1351~1419)는 조선 건국의 계기가 된 위화도회군(1388) 과정에 참여한 회군공신이자, 조선 개국 1등 공신 20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관직은 태종대에 좌의정까지 이르렀다. 죽고 난 뒤에는 태조의 배향공신(配享功臣)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배향공신은 왕을 제사 지낼 때 함께 제사를 지내는 신하를 가리킨다. 신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명예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 사람은 당시 조선에서 거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지만, 천수(天壽)를 누리게 된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태종 18년(1418) 6월에 태종은 왕세자를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바꾸었다. 충녕대군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훗날 세종이 되었다. 에는 왕세자가 바뀐 뒤 6월 기축(10일)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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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일반적인 부부의 특별한 결말, "이것이 내 남편이다"하루실록 2020. 5. 27. 20:12
허지(許遲, ?~?)는 연산군 10년(1504) 과거에서 31명 가운데 19등으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었다. 중종반정(1506)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 중종 3년(1508)부터 사간원을 거쳤고, 중종 4년(1509) 에는 홍문관에 들어가면서, 문과급제자가 갈 수 있는 엘리트 코스를 착실하게 밟아나갔다.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재상도 노려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약 10여 년이 지난 중종 17년(1522) 6월 15일 경인(15일) 허지의 집안일이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다. 허지와 허지의 아내 유씨(柳氏) 사이의 불화가 나라 전체에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사헌부의 조사에 따르면, 허지의 아내 유씨는 평소에 허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미워하고 ‘투기(妬忌)’하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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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 씨가 어찌 천지와 함께 무궁하겠는가하루실록 2020. 5. 23. 00:09
태종 12년(1412) 5월 경자(17일) 서견(徐甄, ?~?)이라는 사람의 시가 조정에서 논란거리가 되었다. 서견이 지었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천 년의 새 도읍이 한강 사이에 있는데(千載新都隔漢江) 충성스러운 자들이 많이 모여 밝은 왕을 돕네(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하나로 통일한 공은 어디에 있는가(統三爲一功安在) 아, 고려의 업이 길지 않은 것이 한스럽네(却恨前朝業不長) 한강에 있는 새 도읍은 지금의 서울인 한성을 의미하며, 전조(前朝)는 고려를 의미한다. 서견은 1행과 2행에서 조선의 개국을 축하하고, 3, 4행에서는 고려의 멸망을 기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는 아직 고려가 멸망한 지 2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던 데다가 서견은 고려에서 관직도 했던 사람이었으니 충분히 쓸 법한 시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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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또는 도둑놈이오!" 산꼭대기에 올라 욕을 퍼부은 사람들하루실록 2020. 5. 22. 02:21
사극이나 역사 관련 콘텐츠를 보면, 일반 백성들은 탐관오리에게 마냥 당하기만 하는, 힘없고 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백성들은 무기력하게 ‘피통치자’에 머물지 않고 나름대로 방법을 고안해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주장을 내세웠다. 서울(한성, 漢城)이 아닌 지방에서 사람들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관원은 수령(守令)이었다. 흔히 “사또”라고 불리는 이들은, 왕을 대신해서 지방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았다. 시기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수령은 조선 전체에 약 330여 개 자리가 있었다. 북한 지역을 포함해서 지금 알고 있는 모든 도시에 수령이 한 명씩 다 파견되어 있었다고 보면 된다. 수령의 가장 큰 업무는 세금 징수와 재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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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수좌(猫首座) 보론(補論)하루실록 2020. 5. 11. 19:49
이전 글, 에서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당시 사관(史官)은 김안로를 고양이에 비유하여 마치 역사 속 이묘(李猫)의 사례와 같다고 말했는데, 이 이묘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이전 글을 쓸 때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추정했던 후보로는, 1)당 고종대 재상 이의부, 2)당 현종대 재상 이임보, 3)고려 우왕대 재상 이인임이었다. 모두 이 씨인 간신들로 고양이로 비유된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묘가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더라도 묘수좌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딱히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지금 알게 되었으니 보충하는 글을 쓴다. 권79, 30년 1월 정축일(16일)의 기사를 보면, 여기서도 사관이 당시 김안로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김안로의 간사함이 2)이임보보다 더 심하다고 말하고 있다(아래 번역 이외에 괄호 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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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놀 순 있어도, 권력은 함께 할 수 없다.하루실록 2020. 5. 10. 00:12
조선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 재위 1400~1418)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사람을 많이 죽인 것으로 유명하다. 태종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이 연이어 제작되면서, '킬(Kill)방원'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그만큼 태종은 권력에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었다. 태종은 왕위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처럼 앞으로 왕의 권력에 문제가 될 것 같은 사람도 미리 처단했다. 권력 앞에서는 피붙이도 없었다. 태종에게 죽은 사람 가운데 민무질(閔無疾, ~1410), 민무구(閔無咎, ?~1410) 형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태종의 아내,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의 동생들이었다. 태종에게는 처가 식구들이었다. 태종 10년(1410) 민무질과 민무구는 어린 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