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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실한 연구자가 되기 위하여
    쓸데없는 생각들 2020. 4. 28.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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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KirstenMarie  on  Unsplash

     

     

    한때는 남을 위해 공부한다고, 우리 사회와 공동체, 세계를 위해 공부한다고, 거창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부라는 행위를 직업으로 삼은 연구자는 결국 자기 만족을 위해 공부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인문학 공부는 더욱 그렇다. 인문학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무지 쓸데가 없다. 굳이 쓸데를 생각해보면, 다양한 생각을 그대로 머물게 해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생존 가능성을 조금 높이는 것 정도이다. 써놓고 보니 역시 꽤나 추상적인 쓸데이다. 그만큼 인문학은 정말 쓸데가 없다.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지 못한다(인문학이 돈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주의하자).

     

     

    그럼 인문학 연구자는 공동체에 기생하는 기생충일까. 생활과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는데 힘을 쏟지 않고 단순히 자기 만족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일까. 어느 정도 그렇다고 본다. 쓸데없는 것도 사는데 필요하다고 믿는 공동체에서만 인문학 연구자는 간신히 기생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문학을 공부하겠다고 나서는 연구자들은 모두 공동체에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것을 꾸준히 만들어내서 갚아야 하는 빚.

     

     

    이 빚을 갚으려면 성실한 연구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속이려고 거짓말하지 말고, 편하게 논증하려고 하지 말고, 지루하더라도 자료를 정면에서 꾸준히 분석해나가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공부가 너무 재밌고 할 때마다 만족스러운 성과가 나오는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빚이 있든 없든 그 사람은 성실한 연구자가 될 것이니까. 문제는 공부하는 과정이 재밌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아서 확신이 없는 나같은 사람이다. 아직은 하루하루가 즐겁다기보다 하루에 정해놓은 공부량, 글쓰기량을 채우지 못하면 조바심이 나는 정도이다. 언젠가 저 빚이 눈덩이처럼 굴러서 내 앞을 가로막지 않을까. 이런 사람에게는 일정한 기준이 필요하다.

     

     

    성실한 연구자의 기준은 "두 번째 책"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기억을 떠올려 찾아보니 신주백이 쓴 <한국 역사학의 기원> 5쪽에 남아 있는 말이었다. 이 말은 저자가 박사학위논문 심사에서 들은 말이라고 한다.

     

    "살아오면서 주변을 보니 첫 번째 책을 내는 사람은 많았어도 두 번째 책을 내는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네. 40대에 들어서면 연구와 행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시기가 오는 것 같아. 자네는 두 번째 저서를 내는 사람이 되게."

     

    주변을 둘러봐도 두 번째 저서, 그러니까 박사논문을 책으로 내는 것 이외에 연구서를 단독저서로 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두 번째 책"을 성실한 연구자의 기준으로 봐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다.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은 내 자신이 미워졌다"

     

    이 글은 2018년 교수신문에 실린, 강원대 사회학과 이기홍 교수의 글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연구자로서 게을렀던 삶을 반성하고, 동료와 후배에게 "후, 너넨 이렇게 하지 마라"라고 말해주는 글이다. 대학원생과 교수의 삶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흘러가는대로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나도 언젠가 학문후속세대에게(그런 게 정말 있다면), 이런 글을 써야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들곤 한다.

     

     

    "두 번째 책", 교육과 연구의 댓가로 돈을 받는 연구자의 삶, 이 모든 것들이 어쩔 때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쩔 때는 멀어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는 당장 오늘 쓰는 글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잘 쓰려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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