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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마을을 추억하며
    쓸데없는 생각들 2020. 5. 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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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Renee Fisher on Unsplash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당신이 20세기 말에 생겨나 2000년대 전성기를 누린 [책마을]이라는 커뮤니티를 기억하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 아재다.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커뮤니티는 한국 육군 인트라넷 구석에 만들어진 사이트이기 때문이다(이 인트라넷은 일반적인 인터넷이 아닌 군 내부 통신망이다). 육군의 공식적인 허가나 홍보는 없었던 듯한데, 책을 다루는 '건전한' 커뮤니티라는 점, 죄다 텍스트로만 이루어져 있는 사이트라 서버에 그다지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점 덕분에 그럭저럭 살아남았던 것 같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인트라넷 상태에 따라 이른바 '폭파'되기 일쑤였지만, 몇몇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데이터를 백업해두어서 버텨낼 수 있었다.

     

     

    1년 동안 말그대로 소대 보병으로, 육군에서 할 수 있는 훈련이란 훈련을 다 해보고 있던 이병부터 일병까지는 [책마을]을 알지 못했다. 행정병, 상황병 업무를 보게 된 일병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나는 [책마을]에 처음 접속할 수 있었다. 당시에도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것이라는 명제에 반쯤은 동의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의지로 가지 않은 군대에 책임감과 열정이 샘솟을 일은 없었다. 군대 생활은 몸만 바쁘지 생각보다 훨씬 더 지루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컴퓨터를 만질 수 있는 병종의 사람들은 어디 재미있는 것 없나 하고 인트라넷 여기저기를 뒤져서 피카츄배구게임을 찾아내고, 그것도 어려우면 엑셀로 직접 게임까지 만들어냈다. 사이버지식정보방이라는 정말 군대다운 이름의 '복지공간'이 있었지만, 내가 있던 부대에는 이마저도 없었다. 독서, 운동, TV시청, 가끔 '간부 찬스'로 즐길 수 있는 비디오게임이 놀이의 전부였다. 이 와중에 접속한 [책마을]은 정말 재밌고 신기한 공간일 수밖에 없었다.

     

     

    인트라넷 커뮤니티가 [책마을] 하나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공군 쪽의 [공감]이나 [싸커매니아]같은 커뮤니티가 몇 개 더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접속해본 다른 커뮤니티들은 일반 인터넷 커뮤니티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책마을]은 추억 보정이 있겠지만 조금 달랐다고 기억한다. 기본적으로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서로 독후감을 읽고 이야기하는 커뮤니티였다. 이 블로그에서 쓰는 "독서후기"라는 카테고리 이름도 [책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사실 책과 상관없이 별의별 주제의 글들이 다 올라왔다. 자작소설이나 에세이가 연재되기도 했고, 학계 동향과 쟁점들이 정리되기도 했으며,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글들이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내가 전역을 2~3개월 앞두고 있을 때는 <88만원 세대>를 둘러싼 논쟁이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커뮤니티의 유지를 위해 군대 주제의 글은 작성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군대가 심심한 곳이라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올라오는 글의 질과 양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대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사회에서 뭘 하다 오는 사람들일까 싶은 글이 많았다. 신채호는 자기가 처한 상황때문에 자료를 외워서 감옥에서 연구를 했다던데 이 사람들도 그런 경지일까 싶었다. 그만큼 딱 봐도 독서량이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글을 썼다. [책마을]을 보고 있으면 이 괴수들은 뭘까 자괴감도 들면서 부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그런 복잡한 기분이었다. 내 또래가 쓴 좋은 글을 보는 경험. 돌이켜보니 이 경험은 나에게 정말 중요했던 것 같다. 아직 좋은 경험인지는 모르겠다. 결국 대학원을 선택하고 연구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는데 일조한 셈이니까. 

     

     

    전역한 뒤 헤아려보니 군대 생활동안 약 100권의 책을 읽었다. 쉬는 시간에 독서 말고는 놀 것이 없기도 했지만, [책마을]을 알게 된 뒤로는 빨리 이 책 읽고 [책마을]에 독서후기 올려야지 하는 생각이 있어서 계획보다 더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기억에 남는 책은 <태백산맥>, <전쟁과 평화> 정도밖에 없다. <태백산맥>은 호흡을 놓치지 않는다면 끝까지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군대 생활의 지루함이 이런 소설마저 재밌게 만드는구나 싶었다. 아마 지금 읽으라면 금방 흐름을 놓칠 책들이다. 이때 열심히 남의 글을 보고 내 글을 써본 훈련들이 알게 모르게 내 삶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몸으로 느끼고 있다. 나는 [책마을]에 10개 남짓의 글을 올렸던 것 같은데, 그때 쓴 글들을 다시 보면 정말 더럽게 못 썼다는 생각만 든다. 잘 쓴 글들을 모방해보려고 애쓴 티가 역력해서 겉멋만 들고 내용은 하나도 없는 나쁜 글들이다. 당장 지워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이때보단 글을 조금 잘 쓰게 되긴 했네 싶어서 보관해두고 있다.

     

     

    글을 읽고 글을 쓴다. [책마을]은 이 단순한 재미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전역한 뒤 이 재미를 '싸제' 세상에서도 되살려보자는 움직임이 있긴 했다. 몇몇과 인연이 닿아 [이솔넷]이라고 해서 공동 블로그 같은 사이트를 만들었고, 여기에 참여도 해보았는데 잘 되지 않았다. 참여한 사람들에게 [책마을] 정도의 집중력을 전역한 뒤에 발휘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싸제' 세상에는 독서와 글쓰기 말고도 재밌는 게 너무 많았다. 이미 이것을 예측한 현자 회원 한 분이 [이솔넷] 제작 과정에서 [책마을]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봤으니 후회되지 않는다. 다만 [책마을] 역사 편찬 작업이 끝까지 가지 못한 것은 아쉽다. 왜 흐지부지 되었는지 지금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책마을]은 내 군대 생활을 버티게 해준 공간이자, 내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한 공간이었다. [책마을]에서 활동했던 당시보다 책, 글과 더 가까워졌든, 아니면 더 멀어졌든, 내가 그랬듯이 [책마을]을 거쳐간 모든 사람들도 [책마을]이 좋은 추억이었길 바란다. [책마을]을 한참 잊고 있었는데 백업된 [책마을] 폴더를 보고 갑자기 생각나서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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