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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중종대 김중량(金仲良) 독살 사건
    하루실록 2020. 5. 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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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Matthew T Rader  on  Unsplash

     

     

    조선 중종 32년(1537) 어느 날 김중량(金仲良)이라는 사람이 죽었다. 김중량의 아들이었던 김빈(金斌)은 아버지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아버지의 첩인 내은장(內隱藏)과 그녀의 사위 정형근(鄭亨根)을 고발했다. 그러니까 정형근은 김빈에게 매부(妹夫)가 된다. 이 사건은 김빈의 말대로라면 첩이 남편을, 혹은 사위가 장인을 독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 윤리를 심각하게 해치는, 강상(綱常)과 관련된 사건이었으므로 왕에게 보고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에 가족 사이의 살인사건이 기록으로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이 사건을 접수한 사헌부는 김빈이 고발한 내은장, 정형근뿐만 아니라, 김중량의 아내인 철비(哲非)와 딸 두리덕(豆里德)은 물론, 고발자인 김빈까지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한성부에서 김중량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김빈의 말대로 독이 검출되기는 했지만, 시신에서 독이 검출된 부위와 관련자들의 증언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김빈은 김중량이 내은장이 가져온 미음을 먹다가 토한 뒤 죽었다고 말했는데, 정작 독은 김중량의 목구멍에서 발견되지 않고 항문에서 발견되었다. 다시 말해, 독을 먹고 죽었다면 먹다가 토한 미음이 아니라, 그전에 먹은 음식에 독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김중량이 독살당한 것은 분명한데, 김빈의 주장과 시신의 상태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조사관들은 이 사건이 김중량의 재산 상속을 둘러싼 갈등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김중량은 명, 일본과 밀무역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의 진상품 거래, 명과 일본 사이의 밀무역 등과 관련해서 중종 11년(1516), 중종 23년(1528)의 기사에 김중량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기사에서 김중량이 재산을 축적하는 모든 과정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명과 일본 사이를 연결하는 통역관들의 연줄을 이용하여 금, 은 등을 유통했던 정황이 어느 정도 나타난다. 김중량의 출신과 신분은 기록에 나오지 않으나, 김중량의 아들인 김빈이 관상감 소속 관원이었다는 점을 보면, 김중량도 이른바 잡과(雜科) 출신 기술관들, 통역관들과 연결될 수 있는 신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김중량의 재산 축적 과정은 이익을 둘러싼 이런저런 고발, 고소에서 조금씩 드러나는데, 그만큼 김중량은 당시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중량의 아내인 철비와 두리덕은 일찌감치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김빈, 내은장, 정형근으로 조사가 집중되었다. 당시 '조사'는 지금처럼 말로 하는 것이 아닌, 형장(刑杖)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이 세 사람은 수차례 형장을 맞으면서도 모두 일관되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처럼 시신 부검 결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특정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김중량의 목구멍이 아니라 항문에서 독이 발견되었고, 김빈, 내은장, 정형근이 모두 김중량이 먹은 미음을 맛보고 별 탈이 없었던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내은장과 정형근을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또 김빈이 독을 미음에 넣고 내은장과 정형근에게 덮어 씌우려고 했다는 증거나 증인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건을 보던 좌승지 황헌(黃憲)은 중종에게, 내은장과 정형근이 김중량을 독살하고 그 죄를 김빈에게 덮어 씌우려고 했다면, 애초에 김빈이 김중량에게 병문안을 왔을 때 실행했으면 됐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김빈은 이미 그 이전에 병든 김중량을 업고 사헌부로 달려가 내은장을 고발하려고 했던 사실이 있으므로 이전부터 내은장을 미워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김중량의 항문에서 검출된 독은 애매한 증거이므로 큰 의미를 둘 수 없다고 말했다. 중종은 정황으로 볼 때 황헌의 추리와 판단이 옳다고 여기고 내은장과 정형근을 무고한 죄로 김빈을 조사하게 했다. 이 뒤로 이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오지 않지만, 김중량은 자연사로 처리되고 김빈은 무고죄로 처벌받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 같다.

     

     

    이 사건은 황헌의 말대로 김빈이 김중량 집안의 재산을 독차지하는 내은장과 정형근을 미워하여 저지른 무고 사건일까. 언제나 그렇듯이 이 사건을 기재한 <실록>의 편집자는 나름대로 판단이 있었던 것 같다. 편집자의 생각은 황헌과 달랐다. 편집자는 주석으로 추가 기록을 남겨두었다. 원래 김중량은 김빈과 따로 살아서 김빈이 병에 걸린 김중량에게 병문안을 갔었는데, 나중에는 김중량이 아들 김빈의 집으로 옮겼다는 내용,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게 된 김빈이 곡식을 요청했으나 내은장이 내어주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으로 볼 때, 김중량은 병이 걸린 상태에서 본가에 머무르지 않고 굳이 아들 집에 갔으며, 적어도 내은장이 김빈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김중량이 미리 어떤 위협을 느끼고 몸을 피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기록을 남긴 <실록>의 편집자는 김빈이 주장한 것처럼 내은장과 정형근이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황헌의 말과 반대로 김중량이 김빈의 집으로 옮겼으니 김빈에게 죄를 더 쉽게 덮어씌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고, 김빈이 내은장을 이미 의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황헌이 해석한 정황은 반대로 김빈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도 충분히 해석될 수도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황헌과 중종은 부검 결과도 흐지부지하게 만드는 결정을 했다. 정말 내은장과 정형근이 범인이었다면, 김빈에게는 너무도 억울한 조치였다.

     

     

    이렇게 증거와 진술이 애매한 상태에서 왕과 대신들은 이 사건을 강상 사건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가능성이 있다. 강상 사건이 왕까지 보고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강상 사건이 당대 사회의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강상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예(禮)의 통치를 강조하는 조선의 왕에게 큰 부담이었다. 재산 때문에 아내가 남편을 독살한 강상 사건보다, 단순 무고 사건이 중종에게 더 편한 결말이었을지 모르겠다. 물론 김빈에게는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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