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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풍자 좀 하는 녀석인가? 정곡공신(正哭功臣) 이곤(李坤)하루실록 2020. 4. 24. 00:39반응형
Photo by Emma Trevisan on Unsplash 정치 기사에 바로 달라붙는 댓글이나 그와 관련한 커뮤니티 게시글들을 보면, 그 짧은 댓글에 응축된 해학과 풍자에 놀랄 때가 많다. 대체 어떤 분들이기에 이런 댓글을 쓸 수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에는 이런 댓글을 연상케 하는 조상님들의 숨겨진 실력이 종종 드러나 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를 꼽아봤다. 다음은 <실록> 기사 링크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504003_002
조선 중종대 이곤(李坤, 1462~1524)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포함된 사람이었다. 공신이란 말 그대로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지위로, 한 번 공신이 되면 자손 대대로 보상과 명예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신은 나라의 건국, 전쟁, 정치적 격변 이후에 선정되었다. 정국공신은 조선의 여러 공신 가운데 연산군을 몰아낸 이른바 '중종반정(1506)'에서 공을 세워 선정된 사람들이었다. 정국공신은 그 안에서 총 네 개의 등급이 있었는데, 이곤은 가장 낮은 정국공신 4등이었다.
이곤은 성종 23년(1492) 31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빛나는 미래가 예상되었지만, 연산군 10년(1504)에 터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는 등 갖은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곤의 행보를 마뜩잖아했던 것 같다. 중종반정이 끝나고 정국공신을 선정할 때, 이곤이 스스로 공이 있다고 말하고 정국공신에 포함시켜줄 것을 울면서 빌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곤이 공신 자리를 진짜 공이 아니라 울음(哭)으로 얻어냈다고 여기고, 정국공신이 아니라 정곡공신(正哭功臣)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곤은 중종반정 당시 폐위된 연산군을 교동으로 호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예 공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중종반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또 호송하는 역할을 이곤 혼자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곤은 바로 공신에 포함되지 못했고, 중종반정의 주모자 가운데 하나였던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이 따로 이름을 왕에게 아뢰고 나서야 공신이 될 수 있었다.
이곤은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단행한 공신 정리 과정에서, 이렇게 어렵게 얻은 공신 자리를 잃었다가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이후 다시 정국공신 자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 별명과 평소 탐욕스러운 행동들 때문인지, 그는 그 이전과 같이 중요한 직책(판결사, 명 파견 사신 등)은 맡지 못했다. 철원 부사로 임명될 때는 아예 부임해보기도 전에 교체되었다. 여주 목사로도 잠시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교체되었다.
이곤 입장에서는 정곡공신이라는 별명이 꽤 억울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매한 공이기는 했지만 넓게 보면 중종반정에 참여한 셈이었고, 또 연산군에게 직접 피해를 당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광조의 공신 정리 내용을 볼 때, 이 정도 공으로 공신이 된 사람은 이곤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곤이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갑자사화를 겪으며 사람이 변한 것인지,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 베푸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주 목사에서 교체되고 4년 뒤, 중종 19년(1524) 이곤은 임시 위장(衛將)으로 창덕궁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당직을 서던 와중에 독이 든 만두를 먹고 죽었다. 의금부 조사 결과 그 만두는 이곤의 종이 만든 것이었다. 이곤이 자기 종을 매질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에 앙심을 품은 종이 저지른 범죄였다.
<실록>에 나오는 이곤에 대한 기록은 이런 것들뿐이다. 이곤은 비루하게 자리에 연연했고, 불의(不義)의 방법으로 재물을 탐했다. 이곤의 모습은 당시 사대부들이 미워했던 인간의 전형(典型)이었던 것 같다. <실록>을 편집한 사람들은, 이런 인간은 당연히 이런 결말에 이른다고 반드시 <실록>에 남기고 싶어했던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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