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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또는 도둑놈이오!" 산꼭대기에 올라 욕을 퍼부은 사람들하루실록 2020. 5. 22. 02:21반응형
Photo by Mirko Blicke on Unsplash 사극이나 역사 관련 콘텐츠를 보면, 일반 백성들은 탐관오리에게 마냥 당하기만 하는, 힘없고 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백성들은 무기력하게 ‘피통치자’에 머물지 않고 나름대로 방법을 고안해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주장을 내세웠다.
서울(한성, 漢城)이 아닌 지방에서 사람들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관원은 수령(守令)이었다. 흔히 “사또”라고 불리는 이들은, 왕을 대신해서 지방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았다. 시기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수령은 조선 전체에 약 330여 개 자리가 있었다. 북한 지역을 포함해서 지금 알고 있는 모든 도시에 수령이 한 명씩 다 파견되어 있었다고 보면 된다.
수령의 가장 큰 업무는 세금 징수와 재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도 세금, 재판은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수령의 잘못된 행동, 예를 들어,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하거나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는 등의 행동을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약(制約)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수령과 일하는 향리(鄕吏), 지방에 살고 있는 양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수령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수령의 인사 평가를 담당하는 관찰사뿐이었다.
이것은 지금 보면 꽤나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모든 지역에서 수령의 지위가 확고하지 않았다는 점, 수령은 왕이 직접 파견하는 직속 대리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어느 정도 필요한 제약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상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불만을 느끼기 전에 관찰사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수령을 먼저 찾아내고 제대로 평가하여 인사 조치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찰사의 시각이 언제나 그 고을 사람들의 시각과 같지 않았고, 해당 수령과 얽힌 인척(姻戚) 관계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관찰사는 1~2년의 임기 동안 도내 지역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각 고을 수령의 인사 평가를 했다(조선 후기에는 한 곳에 머무르며 업무를 보았다). 그래서 현재 자기 고을 수령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관찰사를 찾아가 호소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런데 관찰사를 직접 만나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또 직접 만나 이야기하면 이 역시 법을 어기고 수령을 고발하는 것이었으므로 호소하는 방식을 조금 다르게 했다.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은 중종 15년(1520) 10월 정유(13일)에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처음에 손중돈은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 11월 신미(17일)에 충청도로 내려갔다. 이때 중종은 손중돈에게 충청도의 수령들이 함부로 잔치를 하는 등 문제가 많으니 그것을 바로 잡으라고 당부했다. 손중돈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충청도 사람들의 성격이 강하고 포악(强暴)해서 관찰사와 수령을 업신여기니 어려울 수 있겠다고 대답했다.
손중돈의 걱정대로 충청도 사람들은 새로 부임한 관찰사를 가만 놓아 두지 않았다. 손중돈은 12월 7일 임천을 돌아보고 객관(客館)에서 쉬었다. 그런데 잘 쉬지 못하고 늦은 밤에 깰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객관에 가까운 산에 올라가 부여 현감 양철견(梁鐵堅, ?~?)은 도둑놈이나 다름없다고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너무 늦은 밤이었으므로 이들을 쉽게 잡아들일 수도 없었다. 부여 현감에 불만이 많았던 사람들이 일종의 시위와 ‘악플’로 관찰사를 압박했던 것이다. 이어서 손중돈은 24일에 서산에 갔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묵고 있는 곳에 익명서가 매달린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 역시 서산 군수 김형보(金荊寶, ?~?)를 욕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악플’에 지친 손중돈은 다음 해 중종 16년(1521) 1월 병진(3일)에 또 사직서를 올렸다. 중종은 잘 모르는 백성들이 하는 행동일 뿐이라고 하면서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중돈의 다음 인사 명령은 중종 17년(1522) 4월에야 나왔으니, 아마도 손중돈은 그대로 관찰사의 임기를 채운 것 같다.
당시 손중돈은 사람들이 욕하는 부여 현감 양철견, 서산 군수 김형보, 두 수령이 문제가 될 만한 심각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무지하고 편협한 사람들이 사소한 원망으로 이렇게 ‘악플’을 달아 자신을 괴롭히고 모욕을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손중돈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 다시 말해, 양철견과 김형보의 행적을 다룬 기록은 현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양철견은 세조대 원종공신(原從功臣)인 양정(梁汀, ?~?)의 증손자로 중종 10년(1515)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김형보의 기록은 조금 더 남아 있는 편이다. 김형보는 성종 25년(1494)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처럼 무과 장원 출신이지만 대간은 김형보가 중요한 관직에 진출하려고 할 때마다 문제를 제기했다. 게으르고 조심성이 없는 인물이므로 중요한 관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간의 평가는 김형보의 행적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김형보는 자기 6촌 친척의 죄를 직접 고발해서 이득을 챙긴 적도 있었고, 너무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여 두 사람이나 장살(杖殺, 곤장에 맞아 죽음)했던 일도 있었으며, 업무를 태만하게 처리하여 문제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따라서 양철견은 모르겠지만 김형보의 경우 익명서의 내용이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손중돈은 양철견이나 김형보의 문제를 알면서도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람들의 고발 아닌 고발을 묵인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손중돈은 수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선정(善政)을 펼친 것으로 유명했고, 또 평생 청렴하고 강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므로 특정 인물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손중돈에 대한 평가는 이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평가를 믿는다면 손중돈은 직접 수령 업무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고, 또 청렴하고 강직한 사람이니, 정말 그가 말했던 것처럼 양철견과 김형보의 문제를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욕설을 한 자들이나 익명서를 보낸 자들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은 데다가, '악플'에 실질적인 압박을 느끼고 이어서 조사까지 했던 것이니 손중돈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싶다.
<중종실록>에는 손중돈의 성격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여기에 드러나는 손중돈의 성격이 '악플'의 결말을 결정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누군가 손중돈 등 당시 재상들을 싸잡아서, 재상들 가운데 뇌물로 벼슬을 받은 자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을 들은 손중돈은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자신의 결백을 직접 증명하려고 했다. 이때 영의정이었던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은 손중돈에게, 이렇게 가면 당신은 더러운 이름을 피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 허물이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손중돈은 이 말에 깨달음을 얻고 행동을 그만두었다. 이 이야기로 볼 때 손중돈은 아마도 자신에게 엄격했지만 남에게 그리 엄격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성격은 관리자보다 실무자에 더 어울렸던 것이다. 충청도 관찰사 이전에 경상도 관찰사를 할 때도 인사 평가가 너무 후하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였다. 손중돈은 안철견, 김형보에 대해 조사하여 어느 정도 사실을 파악했을 테지만, 그것이 심각한 사안이 아니었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것은 다른 의도 없이 나름대로 열심히 '악플'을 수용하여 일을 처리한 손중돈에게는 최선의 결과일 테지만, 손중돈의 판단과 달리 정말 다수의 고을 사람들이 양철견과 김형보에게 고통받고 있었다면, 부여와 서산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결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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