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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일반적인 부부의 특별한 결말, "이것이 내 남편이다"
    하루실록 2020. 5. 2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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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Sarah Cervantes  on  Unsplash

     

    허지(許遲, ?~?)는 연산군 10년(1504) 과거에서 31명 가운데 19등으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었다. 중종반정(1506)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 중종 3년(1508)부터 사간원을 거쳤고, 중종 4년(1509) 에는 홍문관에 들어가면서, 문과급제자가 갈 수 있는 엘리트 코스를 착실하게 밟아나갔다.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재상도 노려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약 10여 년이 지난 중종 17년(1522) 6월 15일 경인(15일) 허지의 집안일이 조정에서 논란이 되었다. 허지와 허지의 아내 유씨(柳氏) 사이의 불화가 나라 전체에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사헌부의 조사에 따르면, 허지의 아내 유씨는 평소에 허지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미워하고 ‘투기(妬忌)’하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아내가 아닌 첩(妾)을 두는 것이 합법적으로 가능한 시대였으므로, 이런 일은 허지와 유씨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숱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반적인 일이 일파만파 소문이 나고 조정에서 논의될 정도가 된 것은, 유씨는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허지에게 복수했기 때문이다.

     

     

    사헌부가 조사한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았다. 유씨는 볏짚으로 사람 모양을 만든 뒤, 노비들이 보는 앞에서 "이것이 내 남편이다"라며 사지와 몸통을 잘랐다. 허지가 왕의 명령을 받고 지방으로 나갈 때는 허지가 죽은 것처럼 문앞에 나와 울어서 허지를 민망하게 하고 동네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승정원에서 허지에게 명패(名牌)를 내려 조정에 들어오라고 한 적도 있는데, 유씨는 이 명패를 감추고 보여주지 않아 허지는 명령을 무시한 죄로 처벌받았다. 허지가 파주 목사로 부임했을 때는 자기 노비를 남장(男裝)시켜서 집의 담장을 쌓게 한 뒤, 마치 허지가 자기 집 담장을 쌓는데 파주 사람들을 함부로 동원한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이웃집 수탉이 허지의 집 암탉을 쫓아 담을 넘어오자, 유씨는 “남편과 같은 닭"이라고 하면서 날개를 뽑고 사지를 잘랐다.

     

     

    사헌부의 보고를 들은 중종은 유씨의 행동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사대부의 부인이고 간통을 한 것도 아니므로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우니 내일 다시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다음날 조정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었다. 하나는 유씨를 처벌하려면 본인과 관련된 사람들을 조사해야 하는데, 이러면 유씨의 죄가 커질 수도 있고 옥사도 커질 것이니 둘을 이혼시키는 것으로 적당히 마무리하자는 주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유씨와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의금부에 내려서 철저하게 조사하자는 주장이었다. 중종은 이것이 ‘안방’의 일이라 자세히 자초지종을 알기 어려우니, 일단 관련된 사람들, 노비나 이웃 등을 조사해보라고 했다.

     

     

    열흘 뒤 조사 결과가 나왔다. 유씨의 이웃들, 노비들은 유씨의 행동이 사헌부가 조사한 것과 같다고 인정했다. 중종은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유씨의 죄와 벌을 정하게 했다. 담당 관원의 판단은 사형이었다. 저주로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모살(謀殺)로 보는데, 이렇게 모살을 하려고 했던 사람은 참형(斬刑, 목을 베어 죽이는 사형)이라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담당 관원은 이 판단이 정률(正律), 그러니까 유씨의 행동에 적용할 수 있는 딱 맞는 법 조항이 없어서 다른 조항을 참고하여 따져본(비률, 比律) 결과라고 보고했다. 담당 관원은 유씨가 허지를 정말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단순 투기라고 보았던 것이다.

     

     

    애매하기는 했지만 조사 결과는 사형에 이르는 죄였으므로, 중종은 유씨를 의금부에 가두고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부인의 경우 왕의 명령이 있어야 구속이 가능했다. 7월 정미(3일)에 유씨는 의금부에 끌려 왔다. 그러나 유씨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자 최종 판단은 더욱 어려워졌다. 

     

     

    먼저 유씨가 삼강오륜(三綱五倫)의 하나인 부위부강(夫爲婦綱)을 어기고 조선의 여자들이 피해야 했던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저질렀지만, 사형에 이를만한 확실한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앞서 담당 관원도 정률이 없다고 판단했다. 다음으로 유씨의 죄가 사형에 이르는 죄라고 하더라도 본인이 자백하지 않으면 형벌의 성립이 어려웠다. 조선에서는 죄인이 반드시 자백해야 죄와 벌이 확정되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 조사 과정, 지금 시각에서 보면 고문에 가까운 조사 과정에서 죽어 나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죄를 인정하지 않는 유씨도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낼 것인가, 라는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처음에 허지와 유씨를 이혼시키는 것으로 적당히 마무리하자는 주장을 했던 관원들은 이런 결과를 예상했던 것 같다.

     

     

    허지도 아버지가 대제학을 지낸 허계(許誡, ?~1502)였고 대대로 관직을 했던 집안이었지만, 유씨의 집안도 만만치 않았다. 유씨의 아버지 유빈(柳濱, ?~1509)은 갑자사화(1504)에 연루되었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을 받은 사람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한 개인이 인정받는 시대가 아니라 집안이 중요했던 조선시대였다. 이러한 집안 배경은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상당히 중요한 변수였다. 확실한 법적 근거 없이 공신 집안의 여자를 매로 때린다는 것은 중종을 비롯한 모두에게 큰 부담이었다. 사회윤리를 바로 잡으려다가 오히려 사회윤리를 해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의금부는 유씨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고문하지 않고) 조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사형 대신 장 100대의 벌을 내리고, 재물로 그 벌을 대신하게 했다. 중종은 이 벌이 꽤 가벼워 보이기는 하지만, 이것보다 강한 처벌을 내리기는 어려웠다고 자평하면서 일을 마무리했다.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던 사람들은 조금 머쓱해지는 결과였지만, 그들 덕분에 이 일이 사형과 관련된 일로 다뤄져서 이렇게 <실록>에 남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재위 내내 궁중 여자들에게 끌려다닌다는 말을 종종 들었던 중종을 비판하기 위한 <실록> 편집자의 선택일수도 있다.

     

     

    이 뒤의 일은 <실록>에 나오지 않는데, 허지는 유씨와 이혼하고 새로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씨족원류(氏族源流)>나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에 유씨는 허지의 전실(前室), 다시 말해, 전처로 기재되어 있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도 유씨의 아버지인 유빈이 허지의 장인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허지는 유씨의 저주 탓인지 중종 19년(1524) 병이 깊어서 진주 목사에서 교체되었다. 이 뒤로 기사가 따로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허지는 비슷한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유씨의 경우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좀 받았을 테지만, 가난하게 여생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종대만 하더라도 여자가 소유한 노비는 결혼한 뒤에도 자기의 노비, 정확히는 자기 집안 소유의 노비였기 때문이다. 이혼이 쉬운 일도 아니고 많은 일도 아니었던 이 시기에, 누군가 <부부의 세계(2020)>와 같은 작품을 썼다면 이 일은 좋은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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