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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이 씨가 어찌 천지와 함께 무궁하겠는가
    하루실록 2020. 5. 23.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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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Rodion Kutsaev  on  Unsplash

     

    태종 12년(1412) 5월 경자(17일) 서견(徐甄, ?~?)이라는 사람의 시가 조정에서 논란거리가 되었다. 서견이 지었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천 년의 새 도읍이 한강 사이에 있는데(千載新都隔漢江)

    충성스러운 자들이 많이 모여 밝은 왕을 돕네(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하나로 통일한 공은 어디에 있는가(統三爲一功安在)

    아, 고려의 업이 길지 않은 것이 한스럽네(却恨前朝業不長)

     

    한강에 있는 새 도읍은 지금의 서울인 한성을 의미하며, 전조(前朝)는 고려를 의미한다. 서견은 1행과 2행에서 조선의 개국을 축하하고, 3, 4행에서는 고려의 멸망을 기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는 아직 고려가 멸망한 지 2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던 데다가 서견은 고려에서 관직도 했던 사람이었으니 충분히 쓸 법한 시였다. 그런데 그의 주변에서는 이 시가 꽤나 거슬렸던 듯싶다. 

     

     

    비록 조선에서 관직을 하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서견도 주변이 신경쓰였는지 마지막 순간에 4행의 한(恨)을 탄식한다(嘆)는 글자로 고쳤다. 그러나 이미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다. 서견은 고려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보다는 고려를 추억하고 망한 왕조의 쓸쓸함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조정 대신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대신들은 서견이 시를 쓴 배경을 철저히 파헤치고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태종은 이전 왕조의 신하가 그 왕조를 잊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면서 서견을 조사하지도 처벌하지도 않겠다고 말했다. 덧붙여 태종은 "우리 이 씨가 어찌 천지와 함께 무궁하겠는가(吾李氏豈能與天地無窮哉)”라고 하면서 조선에도 이런 신하가 있으면 좋은 일이지 않겠냐고 말했다.

     

     

    태종의 발언과 조처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조선도 언젠가 끝이 난다’는 생각을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시 왕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끝이 난다고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태종의 사고방식은 끝없이 '치란(治亂, 다스림과 혼란)'이 반복된다는 역사관(歷史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사관은 <맹자(孟子)>의 내용이었으므로 당시 아주 특별한 생각은 아니었다. 서견도 태종과 비슷한 생각에서 시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도 이런 사고방식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실록>은 당대에도 제도의 내용이나 정치적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열람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당대 사람의 자유로운 열람은 제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실록>을 볼 수 있는 자격은 극히 소수에게 부여되었다. 특히 연산군대 <실록> 내용 때문에 학살이 일어났던 이후로 왕은 절대 직접 볼 수 없는 책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일을 살펴보아야 할 때는 아주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실록>이 아니라 <국조보감(國朝寶鑑)>이나 <승정원일기> 등을 참고했다. <실록>은 오직 '다음 세상' 사람들을 위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실린 태종대 <실록> 기사는 당대 사람이 볼 수 없었다.

     

     

    대체 당대에 보지도 않을 책을 왜 이렇게 공을 들여서 만들고 목숨을 걸어서 지켜왔을까. 어떻게 '다음 세상'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까. 사실 이 감성을 조선시대 사람이 아닌 지금 우리가 전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의도한 것처럼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실록>을 보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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