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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죽음에 대한 담담한 기록, 조운흘의 묘지(墓誌)
    하루실록 2020. 4. 1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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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Paweł Czerwiński  on  Unsplash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에는 주요 인물의 사망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을 졸기(卒記)라고 한다. 각 왕대 <실록>마다 졸기를 기록하는 대상과 졸기의 내용, 구성 등이 조금씩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나라에서 장례를 지원해줄 정도의 사람들이 죽었을 때 졸기가 남는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졸기에는 대상의 가문, 관력(官歷), 후손 등이 간략하게 기록되는데, 몇몇 인물의 경우 인물에 대한 평가와 그 인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 등이 같이 기록되기도 한다.

     

     

    <실록>은 편집된 책이므로 대부분의 졸기도 제3자인 사관(史官)과 <실록>편집자의 시각에서 쓰였다. 그런데 특이하게 졸기의 대상 스스로 쓴 글이 포함된 졸기가 있다. 바로 태종대 조운흘(趙云仡, 1332~1404)의 졸기이다. 조운흘의 졸기에는 자신이 직접 쓴 묘지(墓誌)가 남아 있다. 묘지(墓誌)는 죽은 사람의 정보를 적은 글로, 사기판이나 돌판에 새겨 묘지(墓地) 곁에 묻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죽기 전에 자기의 묘지를 직접 쓰고, 그것이 졸기에도 기재된 경우는 흔하지 않다(아직 다른 사례는 아직 보지 못했다). 당시에도 상당히 인상적으로 본 것 같다. 조운흘이 직접 쓴 묘지는 다음과 같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412005_001)

     

    "자헌대부 정당문학 조운흘은 풍양현 사람이다. 고려 태조의 신하인 평장사 조맹의 30대손이다. 공민왕대 흥안군 이인복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했다. 경관과 외관을 두루 거쳤고 다섯 주의 수령을 맡았으며 네 개 도를 관할하기도 했다. 비록 크게 드러난 자취가 없었으나 속되고 비루한 것도 없었다. 73세에 병으로 광주의 옛 원성에서 죽는다. 자식은 없다. 해와 달을 상여의 구슬로 삼고 청풍과 명월로 전(奠)을 삼아, 옛 양주 아차산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를 지낸다. 공자는 행단(杏壇) 위에서, 석가는 쌍수(雙樹) 아래였으니 고금의 성현이 어찌 독존(獨存)하는 자가 있었겠는가. 아아, 인생사가 끝났다."

     

     

    풀어쓰긴 했지만 몇 가지 용어들은 설명이 필요하다. 자헌대부, 정당문학, 평장사, 흥안군 등은 지위와 관직을 가리킨다. 자세히 설명하면 지루해지니 모두 대충 높은 지위로 이해하면 된다. 전(奠)은 죽은 사람에게 장례 전에 올리는 제사 혹은 음식을 말한다. 따로 유별나게 장만하기보다는 청풍과 명월로 대신하겠다는 의미이다. 거기에 상여에 다는 구슬도 해와 달로 대신한다고 하니 검소하고자 하는 조운흘의 의지가 드러난다. 행단은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단이고, 쌍수는 석가가 죽을 때 곁에 있었던 이른바 사라쌍수(沙羅雙樹)를 의미한다. 자신이 자식은 없지만 홀로 외롭게 죽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모두 경험한 사람인만큼 공자와 부처를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비록 크게 드러난 자취가 없었으나 속되고 비루한 것도 없었다(雖大無聲跡 亦無塵陋)"는 부분이다. 기본 정보와 장례 방식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면, 조운흘은 이 한 문장으로 자기 삶 전체를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높은 지위에 올랐고 중요한 관직을 여러 차례 거친 사람의 겸손같기도 하지만, 역사의 격변기 한가운데에서 살아오면서 속되고 비루한 것이 없다는 것은 대단한 자랑이기도 하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 어려운데, 조운흘은 자기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 만족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그 삶을 담담하고 간결하게 정리해냈다. 이렇게 조운흘은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아무 것도 아닌 문장인 것 같지만, 죽음을 마주한 상태에서 자기 삶에 만족하고, 그 삶을 통째로 단번에 정리해낼 수 있을까 자문해보면 잘 모르겠다. 후자도 어려운 일이지만, 전자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도 죽음을 당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꽤 멋진 일일 것이다. 그러려면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죽음을 억지로 곁에 두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려는 각오를 다지다 보면, 역시 말만 쉽다는 생각이 들기 일쑤다.

     

     

    찬 것을 잘못 먹었거나, 과식했거나, 술과 같이 음식을 먹었을 때 배가 자주 아픈 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탈이 나면 종종 인간의 존엄성 문제에 직면하곤 한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다. 빨리 변기에 앉아서 이 고통을 모두 끝장냈으면 하는 생각만 든다. 오늘도 이 고통을 겪으면서, 내 죽음이 이런 식으로 오지 않기를 바랐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이게 그냥 다 끝났으면 좋겠어' 하다가 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다. 나도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죽음을 경험하고 맞이하고 싶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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