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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중종 29년(1534) 남효문 폭음 사망사건
    하루실록 2020. 4. 19.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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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Samia Liamani  on  Unsplash

     

    조선 중종대 영산 현감이었던 남효문(南孝文, ?~1534)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남효문은 중종 11년(1516)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이어서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떤 경로를 거쳐 영산 현감까지 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의 파편적인 기록으로 남효문이 영산 현감 이전에 사헌부 감찰에 임명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될 뿐이다. 남효문의 기록이 추가로 확인되는 곳은 뜻밖에도 왕실 족보인 <선원록>이다. 여기에 남효문은 태종의 동생, 진안대군 이방우의 첫째 딸의 후손 집안의 사위로 기재되어 있다. 아주 정확하지 않지만 이 긴 수식어를 간단하게 표현하면, 남효문은 태조의 6대 외손녀 사위이다. 전주 이씨도 아니고 6대손까지 내려가면서 여러 차례 성씨가 섞였지만, <선원록>에 기재되는 사람은 왕의 친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정확한 과정은 모르겠지만 남효문이 영산 현감까지 오르는데 집안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람이 중종 29년(1534) 5월 어느날 갑자기 소주를 진탕 마시고 죽었다. 아마도 급성 알코올 중독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단순히 술 좋아하는 사람이 술에 욕심을 내다가 죽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실록>에 꽤 많이 보이는 사례다). 왕에게 간쟁(諫諍)을 하는 관서인 사간원은 이 남효문 폭음 사망사건이 사고가 아니라 간통 사건과 얽힌 심각한 사건이라고 판단하고 왕에게 철저한 조사를 요청했다. 조선에서는 사회 윤리를 해칠 수 있는 사건사고를 강상(綱常)과 관련된 일이라고 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당시 사회 상류층의 간통 사건은 강상과 관련된 대표적인 범죄였다.

     

     

    사간원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남효문이 자식이 없어 자기 조카 남순필(南舜弼)을 수양아들로 삼았는데, 이 남순필이 자신의 새어머니, 남효문의 아내 김소옥(金小玉)과 간통을 했다. 이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지만 정작 남효문만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효문에게 한글 편지가 배달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 편지는 남순필과 김소옥이 서로 주고 받던 편지가 잘못 전달된 것이었다. 둘의 간통 사실을 알게 된 남효문은 자신의 어머니 최씨와 함께 아내 김소옥을 불러 추궁했다. 한글 편지를 본 김소옥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남효문은 간통이 사실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충격이 너무 컸던 남효문은 혼자 술을 마시다가 죽고 말았다.

     

     

    조정이 발칵 뒤집어질만한 내용이었다. 남순필은 자신의 새어머니와 간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가 죽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남순필과 김소옥이 간통한 것이 사실이라면 남순필과 김소옥은 살아남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이었고, 남순필과 김소옥이 간통한 것이 악질적인 소문에 불과했다면 남효문은 불운한 사고로 죽은 것이었다. 따라서 사건 조사는 남순필과 김소옥의 간통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 집중되었다.

     

     

    의금부가 관련자들을 10명 이상 잡아들이면서 사건은 금방 해결될 것처럼 보였지만 곧바로 어려움에 빠졌다. 의금부가 처음 잡아들인 사람은 남순필이 아니라 남순보(南舜輔)였다. 남순보가 남효문의 집에 더 자주 드나들었다는 정황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효문의 어머니인 최씨는 둘 다 남효문의 수양아들은 아니며, 남효문이 관청에 나갔을 때 집안일을 봐주던 것뿐이라고 진술했다. 이 진술은 사간원의 설명과 처음부터 달랐다. 사간원과 의금부에서는 남순필, 남순보 등도 최씨의 손자이므로, 최씨를 조사해봤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의금부는 남효문이 봤다는 한글 편지도 확보하려고 했으나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한글 편지를 중간에 전달한 남효문 집안의 종 연석(延石)은 도망다가 잡혔으나, 정작 남효문에게 한글 편지를 직접 전달해주고 심지어 간통을 목격했다는 또 다른 종 흔비(欣非)는 잡지 못했다. 

     

     

    혼란한 조사 과정에서 그나마 한 가지 확인된 것은, 남순필과 김소옥 사이의 간통을 소문을 낸 사람이 죽은 남효문의 첩인 개질동(介叱同), 개질동의 조카 남오을미(南吾乙未), 남효문의 누이 남은대(南銀臺), 그의 아들 우치홍(禹治洪) 등이었다는 것이다. 개질동과 남은대는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 소문을 공유했고, 여기서 시작된 소문이 일파만파 알려지면서 남효문의 숙부인 정세준(鄭世俊)과 이조 참판 심언광(沈彦光, 1487~1540)에게도 알려졌다. 사건 조사가 시작되었을 때 정세준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남효문의 이성 육촌인 사헌부 지평 정종호가 정세준에게 들었던 말을 보고했고, 심언광도 이렇게 큰일이 될 줄 몰랐다면서 남은대의 종인 돌이(乭伊)에게 소문들을 들었던 정황을 보고했다. 이처럼 이 사건은 조정의 대신에게 연결될 정도로 조사 범위가 확대되었다.

     

     

    조사 범위는 계속 확대되었고 진술도 많이 확보했지만 사건의 종결은 쉽지 않았다. 남순필 혹은 남순보와 김소옥 사이의 간통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인 한글 편지가 끝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편지 내용을 직접 봤던 네 사람 가운데 남효문은 죽었고, 남순필(혹은 남순보)과 김소옥은 간통 혐의를 부인했으며, 남효문의 어머니 최씨는 편지가 집에 없다고 진술했다. 그나마 남순보의 집에서 한글 편지가 발견되기는 했으나, 그 편지는 남순보의 누이가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관련자 모두가 도망간 흔비의 말을 듣고 소문을 만들고 퍼뜨리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었다. 흔비가 간통을 직접 목격한 당사자이고, 목격한 내용을 자신들에게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흔비가 잡히지 않는 이상, 지금 잡혀 있는 사람들은 들은 소문을 옮긴 것에 불과했다.

     

     

    사건 조사가 지지부진해지자 처음에 사건의 조사를 요청했던 사간원에서는 보다 강도 높은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간원은 남효문의 어머니 최씨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고, 전국에 명령을 내려 흔비를 찾아내자고 주장했다. 최씨의 경우 그동안 아들을 잃은 상태라는 점, 며느리의 일로 시어머니를 불러다 조사하기 미안하다는 점 등이 고려되어 몇 가지 진술만 확인하는 정도로 조사했을 뿐이었다. 최씨는 한글 편지를 남효문과 같이 본 사람이었고, 또 의금부 조사 전에 흔비를 개인적으로 추궁했던 정황도 있었으므로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사건 조사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혐의를 인정했고 또 흔비가 언제 잡힐지 알 수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양반 부녀들을 오래 잡아둘 수 없다는 중종의 결정이었다.

     

     

    결국 사건은 남효문의 사고사로 종결되었다. 평소 김소옥을 좋지 않게 보았던 남효문의 첩과 누이가 종들이 나누는 뜬 소문을 여기저기 퍼뜨렸고, 그 소문을 들은 남효문이 자기 분에 못 이겨 술을 먹다가 잘못하여 죽게 된 것이었다. 간결하기는 하지만 영 꺼림칙한 결말이다. 김소옥은 남효문이 간통 여부를 추궁했을 때 제대로 자신을 변호하지 못했다. 이것으로 볼 때 아마도 남순필과 김소옥의 간통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최씨는 비록 아들을 잃었지만 손자까지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최씨에게는 증거를 인멸하고 거짓말로 진술할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모든 관련자들의 진술이 최종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흔비는 최씨가 통제할 수 있는 종이었고 최씨가 따로 흔비를 조사하기까지 한 정황이 있었다. 아들과 같이 봤을 한글 편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남효문의 수양아들에 대한 진술은 사간원의 조사와 달라서 사건 조사에 혼선이 발생하게 했다.

     

     

    이 사건은 정황으로 볼 때 집안에서 일어난 숙모와 조카, 새어머니와 수양아들의 간통 사건이다. 간통 사실이 사건 당사자가 허무하게 사고로 사망하면서 바깥으로 새어나갔고,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할머니이자 어머니인 최씨가 손자와 집안을 지키기 위해 몇 가지 결정들을 하게 된 사건으로 보인다. 주요 증거품인 한글 편지 제거, 간통 목격자 흔비 제거, 입양 사실 무효 등등. 이 사건이 있고 8년 뒤인 중종 37년(1542)에 남순필은 어머니의 장례를 지극 정성으로 잘 치렀다고 포상 명단에 오르게 된다. 물론 이 남순필이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름에 쓴 한자도 같고, 남자형제가 셋인 것도 같으므로 그 남순필일 가능성이 크다. 남순필의 친어머니도 당연히 이 사건때문에 고초를 겪었다. 그에 대한 속죄였을까. 아니면 가능성은 낮지만 이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라 간통 혐의를 받았던 새어머니, 김소옥일 수도 있다. 사관(史官)이 어떤 의도로 이 내용을 넣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막장드라마에 좀 더 어울리는 전개는 후자일 때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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