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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 다 있는 고양이, 묘수좌(猫首座)하루실록 2020. 4. 16. 10:26반응형
Photo by Lodewijk Hertog on Unsplash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시대에도 정치는 아주 훌륭한 해학과 풍자의 소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정치 양상을 보고 노래, 이야기, 소문 등을 만들어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번에 살펴볼 <중종실록> 권77, 29년 7월 정해(22일) 기사에도 고양이와 관련된 우화가 남아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ka_12907022_004)
당시 제주 목사로 임명되었던 송인수(宋麟壽, 1499~1547)는 제주도에 부임했다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송인수가 멀리 제주도까지 가서 생활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꾀병을 부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송인수는 경상도 사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물론 송인수에게 왕의 명령을 소홀히 했다는 죄를 물을 수 있기는 했지만, 당시 다른 비슷한 사례들을 찾아보면 송인수에게 내려진 형벌은 다소 지나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지방으로 내려가기 싫어서 이런저런 핑계로 수령 자리를 고의로 미루는 자는 다음 관직에 임명할 때 일정한 제한을 두는 정도였다. 송인수는 아예 부임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일정 기간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는데 다른 사례보다 강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 기사에는 송인수가 왜 이렇게 다른 사례보다 강한 처벌을 받았는지에 대한 사관(史官)의 설명이 남아 있다. 사관은 송인수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제주 목사로 파견된 것이고 또 돌아와서도 큰 벌을 받게 되었다고 썼다. 김안로는 중종대 후반부에 조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한 권력자였다. 드라마 <여인천하(2001)>에서 난정이에게 "희락당(希樂堂) 대감"으로 불리며 활약한 그 사람이다.
바로 이 분 김안로 자신은 문과에 급제한 엘리트였고, 아들은 공주의 남편인 부마로 왕(중종)과 사돈 사이였다. 이 두 지위를 시작으로 김안로는 사대부, 특히 사림(士林)의 대표자이자, 세자(훗날 인종)의 보호자로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이렇게 김안로가 자신의 권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중종실록>을 편집한 사람들은 그것이 다 김안로의 모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김안로를 그야말로 '천하의 나쁜놈', '간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여인천하>는 이 묘사를 아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중종실록> 편집자들은 그가 단순히 왕의 인척으로 권세를 누리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한때 그를 같은 편으로 생각했던 사림을 배신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적대감이 더욱 컸던 것 같다.
송인수도 처음에는 김안로와 뜻을 같이 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나 김안로가 자신의 권세를 위해 사림을 이용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물론 이것은 사관의 주장이다), 김안로와 갈라섰다. 이 과정에서 송인수는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이었다. 사관은 누군가가 김안로를 빗대어 묘수좌의 이야기(猫首座之說)를 만들었는데, 이 이야기가 송인수에게 들어맞았다고 하면서 전체를 기록해두었다.
발톱이 빠져서 더 이상 쥐를 사냥을 할 수 없는 늙은 고양이가 있었다. 늙은 고양이는 그대로 굶어 죽을 수 없어서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늙은 고양이는 귀를 뒤집어 머리에 얹고 마치 머리 깎은 승려가 된 것처럼 행세하고 돌아다니면서, 더 이상 자신은 쥐를 사냥하지 않고 부처님을 모실 뿐이라고 말했다. 쥐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지만 늙은 고양이의 행색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쥐들은 늙은 고양이를 모시고 묘수좌(猫首座)로 한 뒤, 함께 불공을 드리게 되었다. 늙은 고양이는 쥐들과 함께 불공을 드리면서 다른 쥐들이 보지 않을 때 자기 앞으로 오는 어린 쥐들을 몰래 잡아먹었다. 곧 몇몇 쥐들은 묘수좌를 의심하게 되었는데, 묘수좌를 나서서 옹호하는 쥐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묘수좌, 늙은 고양이의 똥에서 쥐의 털이 발견되고 나서야 쥐들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관은 사림을 쥐로 비유하기는 조금 꺼려지지만, 어쨌든 늙은 고양이를 김안로로 비유할 수 있다고 보고 이 기록을 남겼다. 사관에 따르면, 당대의 간신을 고양이로 비유한 사례는 또 있었다. 사관은 이묘(李猫)의 사례를 말하고 있는데 정확히 누구라고 밝혀두지는 않았다. 조선에서 이묘로 불린 사람들로는 당 고종대 재상 이의부(李義府, 614~666), 사자성어 구밀복검(口蜜腹劍)으로 유명한 당 현종대 재상 이임보(李林甫, ?~752), 고려 우왕대 재상 이인임(李仁任, ?~1388) 정도가 있었던 것 같다(묘수좌(猫首座) 보론(補論) 참고)
이때 경상도 사천에 내려간 송인수는 3년 뒤(1537), 계획이 다 있던 고양이가 권력을 잃으면서 복귀할 수 있었지만 곧바로 몇 년 뒤 일어난 을사사화(1545, 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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