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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를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문학과지성사, 2020
    후기(後記)/독서후기 2020. 5. 7.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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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DF로 만들어졌거나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된 사료를 다루는 요즘 연구자들과 조금 세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학자의 작업 과정을 아주 잘 묘사한 책이다. 아무리 봐도 의미 없어 보이는 수많은 사료 더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설명하려고 하는 역사학자의 작업은 흥미로우면서도 매우 지루한 작업이다. 실컷 많은 사료를 죽자 사자 검토해도 허탕을 치는 날이 대부분이다. 겨우 찾으려고 했던 사료를 찾아내 기분 좋게 잠에 들어도 다음날이 되어 맨 정신(?)에 다시 사료를 살펴보면, 사료를 잘못 봤거나 오해한 경우도 많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사료의 양에 기가 눌려, 그야말로 사료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다가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할 때도 있다.

     

     

    지루한 작업 과정은 무려 검색이 되는 전자화된 사료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인 아를레트 파르주는 1941년생으로 지금 연구 환경과 다소 거리가 있는 모습, 예를 들어, 도서관에 가서 카드를 찾아본다거나, 참고문헌 목록을 조사한다거나, 직접 사료를 보고 필사하는 작업 등을 묘사하고 있지만, 무질서한 사료 더미에서 질서를 발견해야 하는 것은 같다. 또 안타깝지만 아직 인력, 언어, 자본 등의 문제로 믿을만한 사료 데이터베이스는 구축되지 못했다. 불완전한 검색으로 모아진 사료는 그 사료의 맥락이 쉽게 간과되어 엉뚱한 해석으로 연구자를 이끌기도 한다. 결국 사료는 종이에서 모니터로 옮겨졌을 뿐이다. 여전히 연구자는 무궁무진한 사료의 바다를 헤엄쳐야 한다. 오히려 많은 사료가 급속도로 전자화되고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연구자가 다뤄야 하는 사료의 양은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그래서 저자의 작업 과정이 낡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저자는 사료의 종류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소재로 삼았다. 저자가 다루는 아카이브는 18세기 파리의 형사 사건 기록물 더미이다. 저자가 볼 때 아카이브는 도저히 남에게 읽히겠다는 의도가 없는 것들이다. 연구자가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아카이브는 절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아카이브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어 연구자가 현장감있게 역사를 서술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연구자가 아카이브의 규모와 현장감에 매몰되어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저자는 아카이브가 그 자체로 매력적이기 때문에 이런 아카이브의 '함정', '유혹'을 알더라도 아예 피할 수는 없으며, 연구자는 작업 과정에서 끊임없이 그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저자의 이러한 설명은 내가 사료를 다루면서 맞닥뜨린 느낌들과 유사해서 흥미로웠다. 세상을 일관되게 이해하고 싶지만, 실제 세상은 불균질하다는 사실을 감당하는 것이 역사(106쪽)라는 말이나, 우연히 생긴 현상과 어떤 방향성이 발견되는 현상을 구분하려는 노력을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도 딱히 아카이브의 '함정'을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연구자가 안고 가야 할 숙명 같은 것으로 적당히 정리하는 저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제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아카이브의 '함정'을 이렇게 저렇게 조심해야 된다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피할 수 있다고 장황하게 늘어놓았다면, '연구자의 아카이브 매몰 현상에 대한 일고찰'같은 별로 독서가 내키지 않는 제목이 나왔을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역사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설명하고 주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117쪽). 또 죽은 과거를 이야기할 어법을 찾아내서 "살아 있는 존재들 사이의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이다(152쪽). 그동안 막연하게 역사가도 학자이자 연구자이므로 무언가를 날카롭게 논증하고 관련된 문제를 지적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역사가는 논증과 지적을 하기는 하지만 결국 복잡한 상황을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감당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직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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