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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트 팩트시대의 팩트와 데이터(Seriously Curious)
    후기(後記)/독서후기 2021. 5. 4.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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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글을 쓰면서 남의 글을 너무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이나 서예도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으면 나의 것을 발전시킬 수 없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독서를 소홀하게 해온 듯하다. 물론 이렇게 의식적으로 독서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을 정도이니 글로 밥벌이를 해보겠다는 나조차 활자보다 다른 매체를 편하게 느끼고 있는 셈이다. 내 글을 읽어줄 독자들은 어떨까. 기능적 의미에서 글쓰기는 여러 모로 예전보다 쉬워졌지만 읽히는 글을 쓰기는 더욱 어려워진 것 같다.

     

     

    오늘 소감을 쓸 책은 제목때문에 산 책, <포스트 팩트시대의 팩트와 데이터>이다. 앞으로 역사가들은 문헌보다 전기신호에 있는 정보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쪽에 관심이 조금 있다. 기록학이 그러한 것처럼 데이터사이언스 분야도 역사학과 아주 긴밀하게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조건이 있다. 앞서 남아 있는 수많은 사료들을 데이터로 바꾸는 쓸데없는(?) 짓을 적극적으로 해내야 한다. 아마도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잉여 자원이 된 AI 가운데 하나가 초서로 된 고문서를 쉽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금세 조건을 충족할 것이다. 다시 말해, 아직은 전망이 구체적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말이다.

     

     

    쓸데없는 말이었다. 이 책 내용은 위 문단의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다. 이 책은 이코노미스트 부편집장인 톰 스탠디지씨가 사람들의 일반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있거나 별로 관심이 없을 법 하지만 흥미로운 현상을 관련 통계와 함께 짤막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인상깊었던 몇 가지를 여기서 소개하면서 감상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복혼(復婚)이 내전을 부추긴다>
    복혼은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가 모두 포함된 개념인데, 내전을 부추기는 것은 보통 일부다처제이다. 일부다처제에서는 ‘일부’의 경제력이 핵심인데, 경제력 경쟁에서 탈락한 남자들이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약탈을 위해 테러와 내전에 가담하는 사례가 굉장히 많다고 한다. 남수단,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북부 등이 예시로 등장하고 있다. 복혼이 내전의 원인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부추기는 정도인 것이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마녀사냥 지도>
    중세 유럽 마녀사냥의 원인으로 역사학자들은 경제 위기, 기후 변화 등을 제시하였다. 최근에는 종교 갈등을 마녀사냥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학설이 등장하였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이 심한 곳에서 마녀사냥도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상대를 적극적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마녀사냥은 일종의 선동, 선전으로 활용되었다. 글쓴이는 이것을 양당의 격전지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미국 대선의 선거운동으로 비유하며 설명했는데 재밌는 접근이었다.

     

     

    <프랑스에서 구마사업이 번창하는 이유>
    일상에서 미신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더이상 그런 부분을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에, 구마사업이 엔터테인먼트 요소와 함께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교회의 입장이 궁금하기는 한데, 아마도 불편한 것을 그저 배제하려고 하다가 아예 통제 기회를 놓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영국에서 청소년 범죄가 감소하는 이유>
    여러 요인이 언급되었지만 결국 인터넷과 스마트폰이었다. 청소년들이 갑자기 착해진(?) 것이 아니라 온라인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마치 한국군의 스마트폰 사용이 병사들 복지와 군 내부 부조리 척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와인글라스는 계속 커진다>
    와인잔이 커질수록 와인이 더 많이 팔린다고 한다. 실제로 정확히 그 인과관계를 증명할 순 없지만 그동안 와인잔은 계속 커져왔고, 또 판매량도 같이 증가해왔다고 한다. 그러면 와인잔을 작게 만들면 어떨까? 와인잔을 작게 만들더라도 원래의 판매량은 유지된다고 한다. 저 인과관계가 정확하다는 전제이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부족한 것이 눈앞에 보이면 꼭 채우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미국에서 부자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
    통계적으로 볼 때 정도는 좋은 대학을 나와 ‘엘리트’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이른바 ‘금수저’는 못 당한다는 것이 결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떤 사회든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능력주의의 이미지는 허구에 가깝다는 게 많은 연구자들의 결론이기도 하다.

     

     

    <회사는 왜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영국의 경제학자 로널드 코어스가 1937년에 내놓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일단 답은, 회사는 시장을 이용하는데 따르는 높은 비용에 대응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왜 시장 거래는 존재하는가? 경제학자들은 이 연속된 질문을 실물거래와 사업거래로 나누어 해결하였다. 단순하고 표준화된, 가령 길거리에서 군고구마를 사는 것은 시장의 힘으로 충분히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여러 구매자가 비슷한 재화를 구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준화되지 않은 재화나 용역을 거래할 때는 상황이 복잡해진다. 이 경우 거래 당사자끼리 서로 되돌리기 어렵거나 파기했을 때 손해가 큰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다. 양쪽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전한 거래는 거의 불가능하고 어느 정도 서로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견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시장의 힘이 비교적 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안으로 필요한 것이 일정한 강제력을 지닌 회사이다. 경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회사의 친절한 독재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 글의 결론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재밌었다.

     

     

    <로봇은 하루 종일 뭘 하고 지낼까?>
    2015년 노동자 천 명당 로봇의 수가 OECD 가입국 가운데 한국이 가장 많았다. 글쓴이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흥미로운 통계였다. 진짜인가?

     

     

    <자율주행 자동차는 소유보다 공유>
    자율주행 자동차는 그 기술의 특성상 길이 아주 잘 닦인 도시에서 제한적으로 활용될 수밖에 없고, 또 소유보다 공유하는 것이 유리한 물건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기술 발전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합리적으로 전망해주는 글이라 흥미로웠다.

     

     

    <세계은행이 보고서에서 ‘and’를 줄여야 하는 이유>
    세계은행이 보고서에 ‘and’를 너무 많이 써서 가독성이 한참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and’ 사용량 변화를 통계로 낼 수 있을 지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안그래도 사람들이 보고서를 잘 읽지 않는데 더 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깊이 있는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지만 몰랐던 사실이나 관점을 적당한 깊이로 알 수 있게 해줘서 좋았다. 신문기사처럼 구성해서 글을 읽는 호흡이 짧은 것도 책의 내용에 딱 알맞는 형식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해서 중간중간 쉬어가며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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