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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육사, <이육사 시집(범우문고312)>, 범우사, 2019
    후기(後記)/독서후기 2020. 4. 17.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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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12월 30일 친구들과 연말모임에서 이육사의 시 <절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육사의 <절정>은 다음과 같다.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Photo by  Jonathan Knepper  on  Unsplash

     

     

    문제가 된 것은 3연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의 의미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었다. 하나는 ‘한 발을 힘있게 밟을 곳조차 없다(K씨)’이고, 다른 하나는 ‘한 발을 둘 공간조차 없다(L씨, 아래 실명은 연구자 이름)’는 것이다. 전자는 경북 영주의 방언을 근거로 한 해석이었고, 후자는 현재 일반적인 해석을 따른 것이었다.

     

     

    관련 논문을 검색해보니 학계에서도 이 <절정>은 해석의 논란이 많은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마지막 4연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의지 혹은 절망의 미학적 초월 등을 상징한다고 보았다(김종길, 오세영 등). 4연이 상징이 아니라 실제 물질적인 대상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는데, 그렇다고 시의 전체적인 맥락을 다르게 보는 것 같지는 않다(박호영, 오하근, 황현산 등). 반면 이 시가 절망의 극복이나 초월이 아니라 절망의 절정에서 쓴 시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마광수). 마광수는 기존 해석들이 이육사의 실제 생애를 너무 많이 고려하여 해석에 반영했다고 비판한다.

     

     

    모임에서 문제가 된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는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현재 학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4연이다. 그러나 마광수의 해석과 같이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을 보면 3연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3연은 연구자마자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재겨 디디다”라는 표현의 사전적 정의('발끝이나 발뒤꿈치만 바닥에 닿게 디디다')를 근거로, ‘조심조심 살피면서 걷는다’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앞선 내용들과 이어서 보면, 모든 곳이 서릿발 투성이라 꼼짝도 할 수 없는, 시인이 처한 극한 상황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해석된다. 무릎을 꿇을 곳도, 조심조심 발을 디딜 곳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을 곧 추위를 피해 쉴 곳을 찾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마광수는 절망과 굴복의 이미지로 보았다. 물론 마광수가 이어서 재겨 딛다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지는 않았지만, 3연을 다르게 볼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시인이 3연에서 굴복이든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든 정확하고 명확한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태를 강조하고자 했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재겨 딛다의 의미도 사전적 의미에서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3연은 무릎을 꿇어 굴복할 수도, 그렇다고 바로설 수도 없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시의 전체적인 흐름을 절망의 극복으로 본다면, ‘한 발을 둘 공간조차 없다(L씨)’라는 해석이 적절해보인다. 시의 전체적인 흐름을 절망의 절정으로 본다면, ‘한 발을 힘있게 밟을 곳조차 없다(K)’는 해석도 가능성이 있다. 이미 3연은 아니지만 4연을 이해할 때 경상도의 사투리를 반영하여 강철을 毒龍으로, 무지개를 무지기(이무기)로 이해 해볼 수 있다는 분석도 제시된 상태이다(권영민). 

     

     

    시에 문외한인 나에게 좋은 시를 알게 해준, 고마운 K씨와 L씨에게 나름 정리한 결과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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