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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백년동안, 2018
    후기(後記)/독서후기 2020. 4. 1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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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훈이라는 사람이 있다. 역사학계에 관심이 큰 사람이 아니라면, 이른바 뉴라이트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을 것 같다. 이 사람이 2018년에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을 썼다. 정규재TV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고, 이 책을 포함하여 총 12권의 책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확인해보니 2권, 3권이 이어서 나오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교보문고에서 잠깐 서서 읽어보았다. 그가 이 책 이전에 쓴 책으로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라는 책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단독 저서는 아니지만 한 책에 실린 <한국사에 있어서 노비제의 추이와 성격>이라는 글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지금 세상에서 바라보는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어떻든, 이영훈은 꼼꼼한 논증을 깔끔한 문장으로 써내는 몇 안 되는 연구자이다. 나는 그의 연구사적 업적이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책도 대부분은 전문가로서 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1)한국 사회는 조선시대에 대한 환상이 있다. 2)환상의 중심에는 세종이 있다. 3)역사학계는 조선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지 않다. 4)역사학계는 경제학계의 성과를 과소평가한다. 이런 것들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면, 그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해와 왜곡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고치는 것이 옳고, 그 분야에서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까지는 동의할 수 있었고, 설령 내 해석과 다른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이 책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유', '근대화'를 쟁취한 대한민국의 위대함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조선은 전체 인구의 1/3이 노비인 '비자유'의 나라였고, 한국이 건국되고 나서야 겨우 '자유'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논증해왔던 복잡한 역사적 사실들을 굉장히 단순화된 역사적 해석의 근거로 삼은 이유도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왜 갑자기 '대한민국'이 나오는지는 도저히 알기 어려웠다. 이 부분에서 그의 문장과 태도는 더욱 단호해졌지만 말이다.

     

     

    그는 억울하고 답답해했다. 물론 그는 억울할 것이다. 그가 머리말에서 여러 차례 병적으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연구사적 업적은 20세기 한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충분히 검토되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지금 시대에 소장학자로 연구를 시작했다면, 훨씬 더 많은 성과를 내고 더 대단한 연구자로 평가받았을 것 같다. 그 억울함 때문인지 다른 어떤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전문가로서의 조심성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어느새 쉽게 남들을 가르치고, 쉽게 세상을 조망하고, 쉽게 앞날을 전망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본인을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확신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고 배워 왔다. 고전의 저자들은 책으로, 사회에 헌신했던 지식인들은 행동으로, 그렇게 가르쳐 왔다. 물론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 바닥에 몇몇은 영원히 그런 '선생님'으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야 그런 '선생님'이 고전에나 나오는 비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실감할 텐데, 지금은 아직 잘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근처 책장에서 발견한 옛날 책의 머리말에는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남아 있었다. 다음은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이라는 책에 저자가 쓴 머리말의 일부이다(최근 개정판이 나왔다). 이미 낡디 낡아버린 역사관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연구자에게 이런 꼬장꼬장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서는 오늘날 일본의 시험 지옥 해소에 무언가 기여한다든가 혹은 묘안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에 관하여 나 자신의 의견이 전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니 한때는 과감하게 그 의견을 포함시켜 이 책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때 나는 문득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나의 임무는 과거의 사실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뽑아내어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세상에 소개하는 데 있다. 사실이야말로 무엇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어설프게 그것에 주관을 섞어 조리하는 이른바 평론가 풍의 태도는 내가 가장 꺼리는 바이다. 동시에 그러한 주관에 따라 다른 내용을 첨가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냉정하고 공평한 입장에서 과거제도와 그 실제를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이리하여 완성된 것이 본서이다."
    -1963년 4월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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