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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관상(The Face Reader, 2013)>에서 몰입을 방해한 장면(스포주의)
    후기(後記)/시청후기 2020. 4. 1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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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관상>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욕을 하긴 할 것이지만 <관상>은 재밌는 영화다. 왓챠 평점 3.5점을 주었다. 점수는 <왕의 남자>와 <광해> 다음이고 <사도>보다 위이다. <관상>은 실제 역사적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영화의 중심에 두고 거기에 휘말리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관상이라는 소재를 활용해서 풀어내고 있다. 역사적 사건의 흐름은 그대로 두면서 인물의 묘사로 군데군데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방식이 재미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역사의 큰 흐름을 바람, 그 안의 인간 군상을 파도로 비유한 영화 대사와 맥락이 닿는 것 같기도 하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영화의 시작과 결말이었다. 영화는 한 노인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부터 시작되고, 그 노인이 죽음에 이르는 장면으로 사실상 끝난다. 물론 영화의 진짜 마지막 장면은 김내경(송강호)이 파도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 장면도 괜찮았다. 하지만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노인이 한명회(우상전, 젊은 시절은 김의성)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한명회의 죽음과 이후 역사적 전개가 김내경이 봐준 관상과 맞아떨어진다는 마무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기승전결이 꽉 짜인 느낌을 선호하는 편이라 한명회가 죽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났으면 했다.

     

     

    몰입을 방해한 장면은 김내경의 아들로 나오는 김진형(이종석)이 김종서(백윤식)의 추종자 혹은 부하들의 백색테러로 눈을 잃는 장면이다. 김진형은 김종서의 행보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가 공격을 당한 것인데, 이것을 지켜본 삼촌 팽헌(조정석)은 눈이 돌아가 수양대군(이정재)에게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을 전달하게 된다. 이 사건은 <관상>의 후반부 진행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 때문에 김내경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흐르게 되고 김내경은 소중한 아들을 잃는다.

     

     

    이 사건은 팽헌의 우발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으로 연결되므로 개연성을 위해 꼼꼼하게 연출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백색테러 당시 김진형은 문과급제자 출신으로 사간원 좌정언이었다. 사간원은 왕이 잘못하는 일을 바로잡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관서였다. 아마도 연출진은 사간원의 관원이 왕에게 잘못된 일을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김진형의 관직을 사간원 관직으로 선택한 것 같다. 그래야 김진형이 단종에게 김종서를 비판하는 장면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6품 좌정언은 사간원에서 말단 관직이므로 공격을 당할 만한(?) 정도의 지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문제는 사간원 좌정언이라는 관직이 그렇게 만만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흔히 사간원은 왕의 눈과 귀로 비유되곤 했다. 사간원 관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곧 왕에 대한 도전이었다. 만약 영화 속에서 나온 사간원 관원에 대한 공격이 조선에서 실제로 벌어졌다면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찾아가 죽이기 전에 의금부가 잡아다 죽였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김내경이 김종서를 배신하게 하기 위한 한명회의 계략이었으므로, 한명회와 수양대군이 잡혀갔을지도 모른다. 부상당한 사간원 좌정언을 앞에 두고 다른 관원들이 "김종서 대감이 그랬다는구먼" 하면서 수군거릴 여유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좌정언이 사간원의 말단 관직이기는 했지만, 애초에 사간원은 장관 포함 다섯 자리밖에 없는 관서였고 당대 최고 엘리트인 문과급제자만 임명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이 계략이었든 아니었든 자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런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백색테러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영화를 잘 따라가다가 여기서 몰입이 많이 깨져버렸다.

     

     

    사극 영화가 항상 고증에 충실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미 정리되어 있는 이야기를 꼭 따라갈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극이라는 형식이 게으른 연출의 명분이나 핑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관상>뿐만 아니라 많은 사극 영화에서 나타나는 문제이다. 이 장면은 글쓴이처럼 스쳐 지나가는 관직 이름에 집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몰입을 방해할만한 전개였다. 영화가 전반부에서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갈등, 한명회의 미스터리를 관상이라는 소재를 활용해서 흥미롭게 풀어나갔던 것과 비교해보면, 후반부는 확실히 짜임새가 떨어졌다. 팽헌이 김종서에게 원한을 품게 되는 과정은, 영화의 전체 흐름에서 갑자기 뚝 떨어져 나온 느낌이었다. 이 중요한 이야기 전개 과정을 촘촘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건과 소재들이 남아 있었을 텐데 너무 쉽게 처리하다 보니 몰입이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서 신파로 마무리라니 정말 최악이었다. 전반부와 마찬가지로 관상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보다 개연성이 있게 만들어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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