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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재(南在)가 선택한 세 명의 왕
    하루실록 2020. 6. 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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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 눈물> 17화에서 발췌. 태종 역을 맡은 이방원, 아니, 유동근.

     

    남재(南在, 1351~1419)는 조선 건국의 계기가 된 위화도회군(1388) 과정에 참여한 회군공신이자, 조선 개국 1등 공신 20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관직은 태종대에 좌의정까지 이르렀다. 죽고 난 뒤에는 태조의 배향공신(配享功臣) 7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배향공신은 왕을 제사 지낼 때 함께 제사를 지내는 신하를 가리킨다. 신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명예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 사람은 당시 조선에서 거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지만, 천수(天壽)를 누리게 된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태종 18년(1418) 6월에 태종은 왕세자를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으로 바꾸었다. 충녕대군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훗날 세종이 되었다. <태종실록>에는 왕세자가 바뀐 뒤 6월 기축(10일) 잔치에서 태종이 남재에게 했던 농담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태종은 ‘무인년(戊寅年)의 일’, 역사가들이 말하는 제1차 왕자의 난(1398) 당시 남재가 허겁지겁 도망 다녔던 모습을 농담의 소재로 삼았다. 제1차 왕자의 난은 당시 정안군(靖安君)이었던 태종이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남은(南誾, 1354~1398)을 제거한 사건이다. 이때 남재는 정도전의 편에 서지 않았지만, 자신의 동생 남은이 정도전과 뜻을 함께 했으므로 지레 겁을 먹고 살아남기 위해 미리 몸을 피하게 된 것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은 남재가 두려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일단 자기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남재는 태종이 정안군이었던 시절 명(明)에 갈 때 같이 갔다 온 사이였으므로 서로 친분이 꽤나 두터웠다. 그러나 남재는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태종의 집에서 어린 충녕대군을 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난리를 쳤던 모양이다.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元敬王后)가 남재에게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고 문제가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했으나 남재는 그래도 불안해했다. 결국 남재는 태종의 집에서 뛰쳐나갔다. 

     

     

    나라에서는 동생인 남은이 죄를 저질렀으니, 정확히는 태종에 의해 그렇게 정리되었으니, 연루 사실과 상관없이 도망간 남재를 찾으려고 했다. 그때 남재는 한 시골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 주인 할머니가 남재를 알아보았다. 남재는 “내가 이렇게 가난하니, 내가 그 남재라면 참 좋겠다”라고 둘러대면서 도망쳤다. 또 한 번은 길에서 태종의 심복이자 좌명공신(佐命功臣)인 마천목(馬天牧, 1358~1431)과 마주쳤다. 마천목이 남재를 알아보고 “영공(令公)께서 어디 가시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남재는 “내가 누구인지 아시오?”하면서 딴청을 피우고 "내가 남재라고?” 하면서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마천목이 웃으며 이제 그만하자고 하자 남재는 “내 3세(世)의 원수 같다”라며 탄식했다.

     

     

    이 이야기는 태종이 직접 농담으로 말한 내용으로 <태종실록>에 그대로 실려 있다. 태종이 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다들 웃으며 각자 알고 있는 남재의 이야기들을 늘어 놓았고, 이것을 듣고 있던 남재는 그저 “껄껄(呵呵)” 웃었다는 것으로 <실록> 기사는 마무리된다. 

     

     

    태종이 남재에 대해 말하고, 그것이 기록으로 남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3년 전 기사인 태종 15년(1515) 12월 계사(30일)에도 비슷한 기사가 있다. 이날은 충녕대군이 남재의 집에 가서 잔치를 했다. 잔치가 한창일 때 남재는 충녕대군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남재는 태종이 왕자인 시절에 태종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권한 적 있었다. 태종은 왕자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디에 쓰냐고 물었다. 그러자 남재는 “왕의 아들 가운데 누가 왕이 되지 못하겠느냐”라고 말해주었다. 남재는 이 이야기를 충녕대군에게 들려주면서, “대군께서 공부를 좋아하시니 제 마음이 기쁘다”라고 말했다. 이때는 아직 양녕대군이 왕세자인 시절이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남재 그 늙은이 참 과감하다”면서 크게 웃었다. 남재는 태종이 아직 왕세자가 아닐 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정종 2년 1월 갑오(28일)에 남재는 대궐에서 정안군이 다음 왕이 될 것이라고 크게 떠들었다가 태종에게 혼이 났다.

     

     

    남재의 삶을 쭉 따라가다보면,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승자의 편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에는 태조를 선택했고, 제1차 왕자의 난에는 자기 혈육과 동료 대신 태종을 선택했고, 양녕대군과 충녕대군 사이에서는 충녕대군, 훗날 세종을 선택했다. 그는 첫 번째 기사처럼 온갖 모욕을 당하더라도 항상 승자의 편에 서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매번 성공했다. 기민하게 눈치를 보고 권력의 이동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했다. 태종은 이렇게 항상 승자의 편에 있었던 남재가 선택한 일(왕세자를 충녕대군으로 바꾼 일)이니 다른 사람들도 군말 없이 따랐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재에 대한 농담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기사에서 태종이 그 이야기를 언제 들었는지, ‘나중에’가 얼마나 나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충녕대군에 대한 태종의 의중을 남재는 미리 알아챘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왕위를 노리던 태종의 마음을 알아챘던 것처럼 말이다. 이 두 기사는 언뜻 보면 시시콜콜한 왕의 농담을 아무 의도 없이 기록한 것 같지만, 이야기가 모두 충녕대군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세종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배치된 기사일 가능성이 높다.

     

     

    남재는 글솜씨도 좋았지만 특히 산수 능력이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격이 무난하고 활달했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매우 가난한 시절을 보내다가 개국공신이 되자마자 남의 재산을 많이 빼앗아서 원망을 많이 들었고, 남은 말고 다른 동생인 남실(南實, ?~?)이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데 돕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태종과 세종을 위해 남재가 자기의 '흑역사'를 제공하여 희생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남재의 당대 인물평을 볼 때, <태종실록>에 남겨진 이야기로 상상하는 남재의 모습이 실제와 크게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남재의 과감한 성격은 고손자인 남이(南怡, 1441~1468)에게 이어졌다. 다만 아쉽게도 남이에게는 남재의 눈치와 승자의 편에 서는 감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용의 눈물(1996)>에서 남재 역을 맡은 것은 배우 손호균이라고 한다(<야인시대(2002)>에서 이석재 역을 맡은 배우로 유명하다). 원래 남재의 등장 장면을 쓰고 싶었는데, <용의 눈물>에서 남재 역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등장 장면을 찾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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