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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궐 담을 넘은 승려 은수(誾修)와 조선 왕실의 불교
    하루실록 2020. 6. 11.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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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Reid Zura  on  Unsplash

     

    조선 중종 34년(1539) 5월 정해(20일)에 내관(內官)이 아침에 복분자를 수확하려고 궁궐 후원에 들어갔다가 외성(外城)과 담장(內墻) 사이에 숨어 있는 승려 한 명을 발견했다. 한양 도성도 밤이 되면 함부로 통행할 수 없는데, 도성 안 궁궐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그러므로 당연히 출입허가도 받지 않은 승려가 발견된 것이다.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잡아서 조사해보니 그는 은수(誾修)라는 승려였다. 당연히 은수가 대체 왜 궁궐에 들어왔고, 또 지금까지 남아 있었는지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조사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은수는 조사 과정에서 매를 버티지 못해 죽었고, 도대체 왜 은수가 궁궐에 들어와 있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은수는 몇 번이나 자백했지만, 그 자백 내용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은수의 첫 번째 자백>

    은수는 김해에서 떠돌다 소림굴(小林窟)에서 지운(智雲)이라는 승려를 만났다. 둘은 시간을 보내다가 전날 저녁에 창의문(彰義門)으로 들어왔다. 궁궐 앞에 이르자 지운은 자신이 궁궐에 들어갈 일이 있으며 이전에도 여러 차례 궁궐에 출입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지운은 운동신경이 대단히 좋아서 높은 담장을 아주 쉽게 넘었고, 지운이 곧 줄을 내려주어 은수도 담장을 넘을 수 있었다. 둘은 수풀 속에 숨어 날이 밝기를 기다렸는데, 은수가 잠이 들자 지운은 은수의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 새벽에 깬 은수는 어쩔 줄 몰라 길을 헤매다가 내관에게 발각되었다. 지운은 승려가 되기 전에 장소명(張小明)이라는 이름이었고, 예조(禮曹)의 나장(羅將, 죄인에게 매질을 하는 사람)이었다.

     

     

    의금부(義禁府)에서는 이 자백에 따라 지운이라는 승려와 장소문이란 사람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마침 근처 승가사(僧伽寺, 현재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에 오늘 아침 처음 객승(客僧)으로 온 학조(學祖)라는 승려가 있었다. 군사들이 학조를 의심하여 잡아와 은수와 대질시켰다. 처음에는 둘 다 당황하여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고 했는데, 조사가 진행되자 은수는 학조를 지운이라고 말을 바꾸었고 학조는 은수를 처음 봤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학조는 중흥사(重興寺, 현재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에서 불교 행사(佛事)를 위해 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학조가 잡힌 승가사, 은수가 지운을 만났다는 소림굴, 학조가 있었다는 중흥사의 승려들을 불러다가 은수와 대질시켰으나 모두 은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목격자들의 진술과 어긋나면서 은수의 자백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예조는 나장이 배치되지 않은 관서였으므로 예조의 나장이 있을 수 없었고, 예조에 근무했던 장소명이라는 사람의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 은수는 지운과 함께 지운의 원수인 김금이(金金伊)를 죽이러 궁궐에 왔다는 추가 진술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날 무자(21일)에 은수는 새로운 자백을 했다.

     

     

    <은수의 두 번째 자백>

    은수는 한성에 사는 내수사(內需寺)의 노비 윤만천(尹萬千)에게 초대 편지를 받았다. 은수는 한성에 올라오는 김에 석정(石丁)이라는 사람의 누이 석덕(石德)을 만나려고 건춘문(建春門)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파수병이 들여 보내 주지 않자 담장을 넘어 석덕을 만나려고 했다. 석정은 현재 경종(敬宗)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된 사람이고, 아버지는 석돌이(石乭屎)이다. 은수가 만나려고 했던 석정의 누이 석덕은 궁궐에서 일하는 나인(內人)이다.

     

     

    앞서 장소명과 달리 윤만천은 실제 있는 사람이었다. 의금부에 온 윤만천은 은수와 대질했다. 이때 은수는 윤만천을 보자마자 자신이 봉은사(奉恩寺, 현재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에 있던 승려라며 아는 척을 했다. 그러나 윤만천은 자신이 봉은사에 간 것은 사실이라 봉은사의 승려들은 자신을 알겠지만, 자신은 은수를 모른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석돌이는 자신의 아들은 12세에 출가한 뒤 본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이번에는 윤만천이나 석돌이처럼 실존 인물이 자백에 등장했으나 내용은 맞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궁궐 안에 있는 나인을 함부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는 것이라, 의금부는 은수의 두 번째 자백 역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다음날 기축(22일)부터 계사(26일)까지 조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조사가 약 7일 동안 이어지면서, 26일에 은수는 약을 토해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중종은 은수를 ‘천천히' 때리도록 하고 은수가 추가로 진술한 내용을 확인하게 했다. 그 추가 진술이란, 자신이 김해 사람으로 부모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석을산(石乙山)이라는 인물과 관계가 있다는 것, 김해의 승려 보담(寶曇)과 봉은사 주지 행사(行思)를 따랐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실 관계가 확인되기 전에, 다음날 갑오(27일) 은수는 8일 동안의 조사 끝에 사망했다.

     

     

    이 사건은 궁궐 보안이 뚫렸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심각한 일이었지만, 그 보안을 뚫고 들어온 사람이 승려라는 것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다. 중종 34년 당시에는 왕실 구성원들이 사적으로 사찰을 후원하거나 불교 행사를 진행한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실록>에서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지만, 조선 왕실 여성들과 불교의 친연성을 고려하면 당시 소문들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대신들, 대간들도 왕실과 불교가 연결되는 소문을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문뿐만 아니라 당시 승려들을 토목 공사에 동원하는 대신 일종의 '승려 자격증'을 발급한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승려 자격증'이 있으면 일반인들보다 세금 납부에서 유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마침 이 ‘월담'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다음 달 6월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단체로 ‘파업’을 하기도 했다. 중종이 사실상 불교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 유생들의 생각이었다. 유생들은 왕실과 불교의 관계를 의심했다. 은수의 진술에 등장한 보담과 행사는 모두 왕실이 지원한 승려들로 궁궐도 출입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 여기저기서 끌려온 승려 모두가 은수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은수와 학조는 서로를 알아보는 듯 당황한 기색이 있었다. 그리고 은수가 대질한 윤만천은 하필 왕실의 재산을 담당하는 내수사의 노비였다. 다시 말해, 은수 역시 왕실과 연결된 승려였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궁궐 안에서 발각되었고, 그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 껄끄러웠던 왕실에 의해 ‘손절’당했다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학조와 윤만천은 은수 말처럼 은수를 정말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왕실을 지키기 위해, 정확히는 왕실과 불교의 관계를 유지해서 얻는 이익을 위해 은수를 모른 척했을 가능성이 있다. ‘파업’에 참여한 유생들은 최근 승려들을 위해 시행된 정책들을 모두 되돌리고,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사찰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중종이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면서 유생들을 어르고 달래 이 ‘파업’은 겨우 무마되었지만 <실록>에 기록은 남았다. <실록>을 편집한 사관(史官) 역시 유생들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사관도 왕실과 불교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보았고 그에 따라 ‘월담’ 사건을 <실록>에 대대적으로 추가했던 것이다. 이처럼 은밀하지만 꾸준하게 이어지던 조선 왕실과 불교의 관계는 명종대 문정왕후의 친(親) 불교 정책을 계기로 조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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