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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약한 고약해의 어원(2)조선 사용 보고서 2020. 4. 20. 01:34반응형
위 링크로 제시한 첫 번째 글에서 고약해라는 사람을 고약하다, 고약해의 어원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했다. 앞으로 추적할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약해가 세종에게 극찬을 들을 정도로 소신 있고 탁견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약해가 당대 특별한 인물도 아니고 고약하다의 어원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그렇게 띄워주게 되었을까, 그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두 번째 글에서는 이 가운데 전자, 고약해가 고약하다는 어원이 될 정도로 특별한 인물이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고약해는 태종 13년(1413) 생원일 때 발탁되었다가 태종 18년(1418) 형조 정랑에서 파직되었다.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아플 때 그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무녀를 불러다 의식을 치르게 했는데, 성녕대군이 죽자 이 무녀를 처벌해달라는 성녕대군 측의 요청이 있었다. 원래 당시 법대로 하면 이 무녀는 사형이었지만 태종이 형벌을 낮춰서 장형(杖刑)과 유형(流刑)으로 집행하게 했다. 그런데 형조에서 장형은 차일피일 미루다 집행했고, 유형은 돈을 내게 하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실무자 및 책임자들이 처벌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당시 형조 정랑 고약해였다.
고약해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5년이 지난 세종 5년(1423)이다. 이때 고약해는 강원도 관찰사를 보좌하는 경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강원도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을 진휼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세종 6년(1424) 고약해는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이때도 태종대와 비슷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세종 7년(1425) 고약해는 경창부 부윤, 지사간원사를 거쳤다. 이렇게 고약해가 파직을 거듭했지만 다시 다른 관직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파직에 이른 잘못들이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잘못이 아니라 업무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잘못, 이른바 공죄(公罪)였기 때문이다.
사간원에 있을 때 고약해는 격구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격구는 말을 타고 공을 치는 운동이었다. 고약해를 비롯한 사간원 관원들은 격구가 고려 말기에 성행한 한낱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당장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격구가 군사 훈련의 목적도 있으니 없앨 수 없으며, 격구때문에 고려가 망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맞받아쳤다. 세종은 사간원이 격구에 대해 지나친 말(極言)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고약해가 반대 의견을 세종에게 말한 첫 사례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고약해가 세종에게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펼쳤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고약해가 있는 사간원은 왕에게 간쟁(諫諍)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다. 고약해는 그저 자신의 업무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사 뒤에도 고약해는 대간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세종은 고약해가 말하는 것 가운데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고약해의 활동은 다른 대간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고약해는 세종 8년(1426) 세종이 직접 내린 인사 명령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인사 담당 실무자를 탄핵한 일로 사간원에서 교체되었다.
고약해는 의례를 담당하는 통례원을 거쳐, 세종 9년(1427) 당상관인 예조 참의에 올랐다. 이어서 병조 참의를 거치면서 고약해는 여러 현안을 세종과 논의했는데, 사간원 시절과 마찬가지로 고약해의 특별한 점은 찾기 어렵다. 양녕대군의 대우에 대해 제일 처음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으나, 이때 끈질기게 세종과 논의한 사람은 고약해가 아니라 김효정(金孝貞, 1383~?)과 김종서(金宗瑞, 1383~1453)였다. 고약해는 오히려 이 논의가 길어지자 최초 자기 의견을 다소 굽히고 세종과 대간을 중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고약해는 호조 참의를 거쳤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고, 곧 이조 참의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도 충청도 관찰사일 때 형벌을 마음대로 늘리고 줄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쯤되면 습관에 가까운 행동이다. 나중에 고약해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도 고약해의 살인사건 조사가 철저하지 않다는 다른 관원의 보고가 있기도 할 정도였으니, 형조 관련 업무 경력을 많이 쌓기는 했지만 일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세종은 고약해가 그래도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계속 불러다 중요한 일을 시켰다. 그런데 세종 16년(1434) 사헌부 대사헌일 때 사헌부 관원끼리 의견이 맞지 않아 서로 탄핵한 사건으로 세종의 고약해 평가는 뒤바뀌게 되었다. 세종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면서 사헌부 관원 서로 탄핵하게 만든 고약해를 두고, "평소 바른 사람인줄 알았는데 지금 일을 보니 그 마음이 간휼(姦譎)하다"고까지 말했다. 이 일로 고약해는 사헌부 대사헌에서 교체되어 황주 목사로 임명되었다. 고약해는 대사헌은 물론, 도내 수령들을 관할하는 관찰사도 지낸 적이 있었으니, 지방 수령으로 임명된 것은 사실상 좌천이었다.
고약해는 수령을 맡은 지 5년이 지난 세종 21년(1439)에 인수부 윤으로 한성에 복귀했다. 이 뒤로 그는 이른바 '수령육기법', 다시 말해, 수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는 법의 극렬한 반대론자가 되었다. 세종 22년(1440) 고약해는 연거푸 이 법에 반대하다가 결국 세종에게 무례하게 말한 죄로 처벌받고 다시 주요 관직에서 멀어졌다. 고약해는 세종에게 말할 때 자신을 신(臣)이 아니라 소인(小人)으로 지칭하고 세종의 말을 중간에 끊는 등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좌천에 대한 서운함도 컸을 것이다. 세종은 고약해가 나간 뒤, 도승지 김돈(金墩, 1385~1440)과 따로 고약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종은 이 뒷담화를 기록하지 말라고 했으나 지독한 사관(史官)이 기어이 기록하여 <실록>에 남아 있다. 세종은 고약해가 뜻은 크지만 행실은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열두 번이나 수령을 지낸 자도 있는데, 고약해 자신은 겨우 한 번 수령을 했으면서 수령 자리를 꺼려하고 법까지 파기하려 한다고 말했다. 세종은 고약해가 효령대군의 집에서 수령 자리를 꺼려하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김돈은 고약해가 관찰사일 때 기생을 수레에 싣고 다니면서, 말로는 기생을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결국 고약해는 이 뒤로 주요 관직을 맡지 못하고 3년 뒤 세종 25년(1443)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고약해의 생애를 볼 때, 고약해는 업무 능력이 아주 특출났던 것도 아니고, 학문적인 성과로 인정받지도 못했으며, 자기 의견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 물론 자기 지위와 상관없이 자기 의견을 왕에게 어떻게든 그대로 전달하려고 했던 우직한 사람이기는 했다. 졸기(卒記)에 기재된 사관(史官)의 평가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고약해는 장단점이 분명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세종의 극찬을 받을만큼, 그러니까 고약하다의 어원이 될 만큼 능력과 태도를 보여줬는지 애매한 인물이다. 오히려 세종이 관심을 갖고 추진한 굵직굵직한 일들을 정면에서 하나하나 반대한 사람은 고약해가 아니라 황희(黃喜, 1363~1452)였다. 고약하다는 말의 어원이 인물에서 비롯되었다면, 고약해보다는 황희가 그 어원에 어울리는 행보를 보여줬다. 그렇다면 왜 고약해가 주목받게 되었을까. 이것은 세 번째 글에서 다루려고 한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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