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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약한 고약해의 어원(1)
    조선 사용 보고서 2020. 4. 10.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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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장헌대왕실록> 권88, 22년 3월 경신(18일), 태백산사고본 28책 88권 30장 A면 

     

    고약해

    어느 날부터 갑자기 "고약하다"는 우리말이 조선시대 인물 고약해(高若海, 1377~1443)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온라인에 떠돌기 시작했다. 글자 형태를 보면 꽤 그럴듯하다. 고약해. 고약하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다. 글자 형태만 그럴듯한 것도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에 근거한 이야기도 덧붙여져 있다. 간단하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약해를 "고약하다"의 어원으로 설명하는 글마다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실록>을 참고했으므로 대강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약해는 태종 13년(1413)에 발탁된 인물로, 태종대에 형조 정랑까지 올랐다가 성녕대군(태종의 넷째 아들)이 관련된 소송을 잘못 처리하여 파직되었다. 세종대에 용서를 받고 다시 돌아온 고약해는 관직 생활을 이어나가 종 2품 호조 참판까지 승진했다. 이렇게 고약해가 호조 참판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고약해와 세종은 각종 사안을 두고 여러 차례 충돌했다. 세종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고약해를 마뜩잖아하면서도 중요한 자리에 계속 두었다. 그러나 결국 세종 22년(1440) 고약해는 사사로운 이익에 따라 나랏일을 논의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왕의 말을 끊는 등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난 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괴팍하고 지독하게 고집하는 사람을 "고약해와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약하다"의 어원이 된다는 설명이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왕이면서도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를 중용하려고 했던 세종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가 아무리 왕이라도 고집스럽게 바른말을 하는 고약해의 태도이다. 이제 이 이야기의 등장으로 "고약하다"의 고약해 어원설은 더욱 그럴듯해졌다. 그러나 입에 잘 붙는다고 해서, 고약해가 <실록>에 등장하는 인물이라고 해서, 이 주장을 그대로 믿기에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고약해 어원설의 시작은?

    먼저 고약해로 "고약하다"의 어원을 설명하고 있는 신문기사, 웹사이트, 저서들을 살펴보면, 문헌 근거를 제시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다. "고약하다"의 어원이 고약해에서 비롯되었다면, "고약하다"라는 말은 세종의 훌륭한 모습과 고약해의 강단 있는 태도를 한 번에 보여줄 수 있는 대단히 상징적인 말이다. 당대 혹은 후세 사람들이 세종과 고약해를 평가할 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보다 "고약하다"는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만 기록해놓으면 단 번에 그들의 대단함을 알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약하다"가 고약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조선시대 기록은 확인된 적이 없다.

     

     

    다음으로 이 고약해 어원설을 주장 혹은 인용하고 있는 글들이 2010년대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 수상하다. 온라인에서 검색해보면, 2015년부터 고약해가 "고약하다"의 어원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글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앞선 것은 조선일보 Weeklybiz의 2015년 1월 10일 기사이다(세종대왕, 회의 때마다 싸움 붙였더니… 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기사는 광운대 경영학과 이홍 교수의 삼성 사장단 강연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그 가운데 "고약하다"의 어원이 고약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 뒤에 나오는 여러 칼럼, 사설, 기사 등에서도 고약해 어원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2018년 10월 14일에 방영된 MBC 서프라이즈에 고약해 어원설이 다루어지면서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본격적으로 널리 퍼진 듯하다. 그런데 이 기사와 방송 이전, 그러니까 2015년 이전에 고약해 어원설을 주장 혹은 인용하는 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재 1800년대 후반부터 2000년까지 구축된 여러 신문들의 데이터베이스에도 고약해 어원설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고약해"라는, 지극히 현대 국어 같은 말을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썼을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이 있다. 어문학, 음운학 등에 지식은 전혀 없지만, 이두를 읽는 방법만 보더라도 조선시대에 "응, 너 참 고약해" 같은 말을 쓰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훈민정음>으로 15세기 국어 발음을 재현했다는 영상을 봐도, 고약해가 그대로 "고약해", "고약하다"는 말로 연결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고약해가 어원이라면 왜 전체 이름인 "고약해"가 남지 않고 마치 종결어미를 고려한 것처럼 "고약" 부분만 남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오다보니 고약해 어원설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남은 질문은, 근거도 뚜렷하지 않은 고약해 어원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나온 것일까 하는 것이다. 누가 나한테 시킨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을 보면 괜히 내가 찾아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조금 더 찾아봤다. 참고로 국립국어원은 누군가 올린 관련 질문에 대해, "고약하다"의 어원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을 수 있다는 선에서 답변했다.

     

    고약해가 우리에게 알려지기까지

    온라인에 고약해 어원설이 퍼진 양상을 보면, 고약해 어원설이 그렇게 먼 과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과거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단 사람들이 조선시대에 고약해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 아마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실록>을 웹 서비스하면서 고약해는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한층 가까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가 아닌 이상에야 실록을 처음부터 읽어서 고약해를 찾아낼 사람은 거의 없다(혹시 모르니 단언하지는 않겠다).

     

     

    소수의 연구자들만 그럭저럭 알고 있었던 고약해라는 사람을 일반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공헌한 것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 세종국가경영연구소와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였던 것 같다. 여기에 소속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세종의 '리더십(Leadership)'을 설명할 때 고약해와 세종의 의견 충돌 사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신문기사, 저서, 방송 등 여러 매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당시 대선주자(?)도 이 기관 사람들과 함께 '스터디'를 하기도 했다(주간조선, 2012년 1월 9일). 고약해의 이야기는 세종이 보여준 소통의 리더십, 포용의 리더십을 강조하는데 꾸준히 활용되었다. 고약해의 이야기는 앞서 고약해 어원설이 등장한 2015년 강연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특히 정치, 경영 분야 쪽에서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의 리더십은 바로  정치인, 경영인의 이상적인 리더십으로 연결되었다. 심지어 세종뿐만 아니라 고약해도 <2018 현대건설 '고약해' 캠페인-우리의 잃어버린 목소리 고약해를 찾습니다>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할 말은 하는 조직 문화 만들기를 내세우는 운동인 것 같다).

     

    고약해가 어원이 아닌 것은 맞지만

    고약해 이야기는 2018년 세종 탄생 600주년을 맞아 더욱 활발히 재생산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리더십을 강조했던 사람들이 고약해 어원설까지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고약해가 세종에 맞서서 괴팍하고 집요하고 지독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이야기가 뒷받침되어야 고약해 어원설이 성립된다는 점에서 볼 때, 애초에 고약해의 이야기가 강조되지 않았더라면 고약해 어원설도 없었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고약해 어원설은 2000년대 후반에서 2015년 사이에 누군가가 고약해의 이름과 이야기에서 착안하여 스리슬쩍 만들어낸 것이라고 판단되는데 아직 그 정확한 시작점을 추적하지는 못했다. 물론 2000년대 이전에 이미 고약해라는 인물이 연구자들에게 발견되어 유명해졌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현재 학계에 고약해 개인에게 주목한 연구도 없고 세종대에 활동했던 다른 인물들을 고려해보면 고약해는 특별히 주목할만한 인물이 아니다.

     

     

    조선시대 연구자로서 고약해 어원설은 현재 한국 사회가 조선시대 역사를 '사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아직 이 방식이 왜 마음에 들지 않는지까지 설명하기에는 글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고약해 어원설을 믿지 않게 된 이유만 정리하고 마무리하지만 지속적으로 추적해보려고 한다. 이 추적이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기에,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조사한다는 것은 고역이기에, 또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길게 쓰다간 이것도 일이 될 것 같기에, 다음 글에서는 고약해 어원설의 기반이 된, 고약해의 이야기를 자세히 검토해보려고 한다.

     

     

    고약한 고약해의 어원(2)

    고약한 고약해의 어원(1) 위 링크로 제시한 첫 번째 글에서 고약해라는 사람을 고약하다, 고약해의 어원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했다. 앞으로 추적할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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