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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약한 고약해의 어원(3)
    조선 사용 보고서 2020. 5. 1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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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마지막이다. 이전 글들을 링크로 걸어둔다.

     

    고약한 고약해의 어원(1)

    고약해 어느 날부터 갑자기 "고약하다"는 우리말이 조선시대 인물 고약해(高若海, 1377~1443)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온라인에 떠돌기 시작했다. 글자 형태를 보면 꽤 그럴듯하다. 고약해. 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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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약한 고약해의 어원(2)

    고약한 고약해의 어원(1) 위 링크로 제시한 첫 번째 글에서 고약해라는 사람을 고약하다, 고약해의 어원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했다. 앞으로 추적할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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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글에서는 고약해라는 사람을 고약하다, 고약해의 어원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를 살펴보았다. 두 번째 글에서는 사료로 볼 때 고약해가 그만큼 고평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다시 말해, 성군으로 칭송되는 세종마저도 바른말로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였는지 살펴보았다. 그래서 고약해가 그 정도의 인물이었는지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번 글에서는 도대체 왜 고약해가 주목받게 되었는지 검토해보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고약해는 '세종 띄우기'를 위해 사용되는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이 소재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세종이 당시 노비에게 무려 출산휴가를 줬다던가, 애민(愛民)의 마음에서 한글 창제를 했다던가, 형벌을 줄여주었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고약해의 이야기는 세종의 리더십, 반대 의견이나 비판도 들어보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쓰인다. 고약해 이야기의 구성은 고약해를 드러내기보다 세종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Photo by  Yujing Zhang  on  Unsplash

     

    세종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왕이지만, 우리는 세종이 조선시대 당대의 맥락에서나 훌륭한 왕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최근 세종을 띄우는 사람들은 세종의 평가 기준을 엉뚱하게도 지금 우리 시대에서 끌어 오고 있는데, 이것은 세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하는 행동일뿐만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다. 물론 최근 이영훈처럼 우리 시대 기준에서 거꾸로 세종을 깎아 내리고 싶지도 않다(이에 대해서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독서후기 참조). 그러나 세종을 완전무결한 성군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세종에 대한 환상을 만들었다는 설명에는 공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세종의 모습에는, 역사 기록에 남겨진 세종의 모습뿐만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욕망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백성들을 사랑했다거나, 백성들에게 자비로웠다거나, 비판도 수용할 줄 알았다거나 하는 등의 리더십은, 백성을 국민으로 바꾸면 지금 시대에도 필요한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 국민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고, 자비로운 것은 무엇이며, 비판을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단편적이고 모호한 이미지들이 나열된 것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공약 없이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썩은 정치를 없애겠습니다"하는 구호를 내세우는 선출직 후보와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기 위해서는, 아직도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세종대 정책 논의 과정을 꼼꼼하게 분석해야 하는데, 이것은 대단히 오래 걸리고 지루한 작업이며 무엇보다도 돈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약해나 출산휴가와 같이 세종대 전체 맥락을 이해할 필요 없는 단편적인 사례들만 꼽아서 세종을 쉽게 평가하고 또 각자의 욕망을 마구 투영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랑, 자비, 포용 등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조선의 왕 가운데 세종이 그렇게 특별했는지 잘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위의 리더십 내용은 모두 유교의 가치에 따라 조선의 왕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처럼 세종에게 환상을 덧씌워 띄우는 방식이 이상적인 지도자를 '기다리는' 사고방식을 만드는데 일조한다고 생각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권력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민주공화국에서 이런 사고방식이 필요한 사람은 유권자를 속이려는 선출직 후보들뿐이다.

     

     

    지금 시대에 세종은 지도자보다는 한 사람으로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세종은 말년에 자신이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했다. 세종이 야심 차게 밀어붙인 정책들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만큼 세종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떤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시도했다. 어떤 일을 하든 필요한 만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끝장을 보려고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장기적으로 볼 때 실패로 이어지거나 예상하지 못한 문제점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바보 같아 보이지만, <훈민정음>도 일의 끝장을 보려다 생긴 결과물 가운데 하나였다. 세종은 한 사람으로서 초인에 가까운 행동과 태도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세종실록>의 편집과 구성을 보면, <실록>을 편찬한 사람들도 세종 같은 사람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나는 애민 군주(?) 세종보다 이런 면을 고스란히 드러내준 세종에게 더 애착이 간다.

     

     

    세종에 대한 환상과 띄우기는 고약하다의 기원이 고약해라는, 근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야기까지 만들어냈다. 앞으로도 비슷한 이야기가 또 생겨나고 수없이 재생산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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