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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조와 신숙주의 팔씨름 이야기 출처는?
    조선 사용 보고서 2020. 5. 1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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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m wrestling Photo by engin akyurt on Unsplash

     

    세조(李瑈, 1417~1468, 재위 1455~1468), 신숙주(申叔舟, 1417~1475),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성격과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이야기로 팔씨름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왕이 된 세조, 신숙주, 한명회 등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세조와 신숙주가 팔씨름을 하게 되었다. 신숙주는 취한 나머지 세조의 팔을 크게 꺾고 말았는데, 세조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불쾌했다. 이것을 눈치챈 한명회는 신숙주에게 오늘만큼은 책을 읽지 말고 그대로 자라고 했다. 신숙주는 아무리 취하더라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책을 읽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숙주는 한명회 말에 따라 잠을 잤다. 과연 세조는 내관(內官)을 시켜 신숙주가 정말 취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다른 감정이 있었던 것인지 확인하게 했다. 평소와 다르게 신숙주가 책을 읽지 않고 잠이 든 것을 확인하자 세조는 웃으며 안심했다.

     

     

    한명회가 신숙주에게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종을 시켜서 신숙주가 일어나도 책을 읽지 못하도록 촛대를 미리 치워놓았다든지, 훗날 예종이 되는 세자가 그 자리에 함께 있어서 세조가 예종에게 "후, 너는 이런 것 하고 놀지 마라"라고 했다든지 하는 이야기의 살들이 더 있지만 뼈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살이 붙든, 이 이야기는 술자리를 좋아하고 의심이 많았던 세조, 책을 좋아했던 신숙주,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이 좋았던 한명회의 모습을 모두 드러낸다. 이 이야기는 야사(野史)로 알려져 있지만, 정사(正)에서 그려진 세조, 신숙주, 한명회의 모습과 크게 어긋나지 않아 많은 콘텐츠, 매체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출처는 어디일까.

     

     

    이 이야기를 다룬 매체 가운데,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노출되었다고 판단되는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2016)>(이하 <설민석>), 다른 하나는 <역사저널 그날2: 문종에서 연산군까지(2015)>(이하 <역사저널>)이다. <설민석>에서는 이 이야기의 근거가 <소문쇄록(謏聞鎖錄)>이라는 책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반면 <역사저널>에는 건국대학교 교수 신병주가 TV프로그램에 참여,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그런 근거조차 제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역사 관련 콘텐츠를 만들 때 항상 출처, 근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상상력을 제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책은 어찌 되었든 만화, 영화, 드라마, 소설 같은 2차 창작물이 아니다. '가벼운 역사 산책'같은 것을 표방하기는 해도 이런 성격의 책에서 제대로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곤란하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부주의한 출처 하나가 조선시대 '사용'을 충분히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을 때 하나하나 따져두는 것이 좋다.

     

     

    출처를 밝히고 있는 쪽이 역사학 연구자가 참여한 후자가 아니라 전자라는 점이 어이없기는 하지만 일단 그 문제는 넘겨두고, 이 이야기의 출처는 <설민석>에서 쓴 것처럼 <소문쇄록>이 맞기는 맞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근거를 찾아볼 수 있게 정확하게 출처를 표시하자면 <소문쇄록>만 써서는 안 된다. <소문쇄록>은 조신(曺伸, 1454~1529)이 쓴 것으로 알려진 책인데, <소문쇄록>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조선 후기에 이런 책들을 모아서 엮었다는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소문쇄록>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설민석>도 이 내용까지는 주석으로 달아두었다. 문제는 지금 남아 있는 <대동야승>의 <소문쇄록>에는 이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대동야승>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있다. <해동야언>은 허봉(許篈, 1551~1588)이 쓴 책으로, 규장각에 원본이 남아 있으며, <소문쇄록>과 같이 <대동야승>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해동야언>의 2권 세조대 서술 부분에 이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이 이야기는 <소문쇄록>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기록이 함께 남아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출처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 이야기는 현재 <대동야승>에 있는 <해동야언>에 남아 있으며 원출처는 <소문쇄록>"이라고 해야 한다. 아래는 이야기의 출처를 직접 볼 수 있는 <한국고전종합DB> 링크이다.

     

     

    한국고전종합DB

     

    db.itkc.or.kr

     

    조신과 허봉이 살았던 시대, 저술했던 시점을 고려했을 때, 이 이야기는 당대에 꽤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정사(正史)라고 할 수 있는 <세조실록>에는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지만, <중종실록>에는 관련 내용이 남아 있다. 아래 링크로 남긴 중종 30년(1535) 1월 을해(14일) 기사를 보면, 이 이야기처럼 자세하지 않지만 신숙주가 술을 많이 마시고 세조에게 말실수를 했다는 말이 남아 있다. 조신이 1529년에 죽었고, 허봉이 1551년에 태어났으니, 이들은 1500년대에 널리 퍼져 있던 이야기를 기록으로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79권, 중종 30년 1월 14일 을해 1번째기사 1535년 명 가정(嘉靖) 14년 죄인 홍섬이 자신의 실수를 상소로써 변명하니 이에 대해 전교하다

    sillok.history.go.kr

     

    실화 여부를 떠나서 이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실제로 세조는 왕위에 올라서도 그렇게 가까웠던 한명회와 신숙주를 끊임없이 의심했고, 술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라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술자리에서 한 실수로 여러 사람들이 끌려가 맞기도 하고 또 죽기도 했다. 신숙주는 자기 아들이 반란군의 손에 죽고 나서야 겨우 세조의 의심을 떨칠 수 있었다. 신숙주는 그렇게 책을 좋아했던만큼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가 되었고, 한명회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과정에서 발휘한 기지와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숱한 위기를 넘겨 결국 천수를 누렸다. 이 이야기는 비록 야사(野史)이고 규모가 크진 않지만 마치 초한지의 홍문연 이야기와 같이, 역사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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