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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빌론(2023)_변화에 적응한다는 건
    후기(後記)/시청후기 2023. 4. 6.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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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줄거리에 대한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밌었다. 나는 이 영화가 역사학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작업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영화 내적으로는 두 가지, 외적으로는 한 가지가 인상이 깊었다.

    1. 다채로운 군상극

    <바빌론>은 기본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뒤쳐진 사람들을 둘러보는 군상극이다. 시대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공간은 비로소 동시녹음으로 “소리”가 생긴 1920년대 미국 할리우드 영화판이다. 이때 영화라는 매체에 소리가 추가되면서 이른바 무성영화의 시대는 끝났다. <바빌론>은 이 변화를 겪는 사람들의 삶을 따라간다.

    주요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잭(브레드 피트)은 무성영화판에서 누구보다 잘 나갔던 배우이다. 그는 이 변화를 포착했고 미리 준비해서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실패한 인물이다.

    넬리(마고 로비)는 무성영화판에서 그야말로 빛나던 스타였지만 결국 이 변화에 적응하지 않기로 선택한 인물이다.

    매니(디에고 칼바)는 이 변화를 현장에서 느끼고 잭에게 변화를 알리는 한편,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넬리를 이 변화에 적응시키려는 인물이다. 그는 변화를 이끈 소리를 이용하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넬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팔머는 떠났고 넬리도 구해낼 수 없었다. 매니는 할리우드를 떠난 뒤에도 여전히 소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팔머(조반 아데포)는 이 변화로 영화와 관계 없을 줄 알았던 자신의 음악 연주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된 인물이다. 그러나 음악은 영화의 수단으로만 존재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됐다. 결국 팔머는 영화판 자체를 떠나 다시 라이브 공연장으로 돌아갔다.

    리(안나 메이 웡)는 무성영화에서 필요한 자막을 쓰는 인물이다. 이 변화로 리 역시 설 자리를 잃는다. 넬리가 리에게 끌리는 것도, 리가 잭을 위로할 수 있는 것도, 자막이 무성영화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본다. 이후 영화에서 리의 이야기는 방향이 분명하지 않은데, 이는 우리가 모두 알듯 영화에 소리가 들어왔다고 해서 자막이 아예 사라지진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엘리노어(진 스마트)는 이 모든 과정을 안과 밖에서 지켜보는 관찰자다. 기자 혹은 평론가로서 그녀는 변화를 설명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배우를 평가한다. 잭의 말처럼 그녀는 영화판에 기생하는 인물이지만, 그와 동시에 잭이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스타였다는 사실을 기록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바빌론>에는 잭의 친구와 영화제작자들, 배우들, 마피아, 갱, 평론가, 사업가 등 1920년대 미국의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이 사람들은 영화 제목이 비유하듯이 “소리”때문에 변화한 세상을 중심으로 다채롭게 묘사된다. 등장인물이 많고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여 어지러울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꽤나 중심을 잘 잡고 진행된다. 변화한 세상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쳤는지 보여주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아주 공들인 넬리의 첫 스튜디오 촬영 장면이 그렇다.

    물론 사족이 아주 많은 영화다. 특히 그야말로 뱀이 나오는 장면을 중심으로 하는 넬리의 가족관계 묘사가 내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사족처럼 느껴졌다. 감독이 해당 장면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바빌론>은 대체로 영화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슷한 군상극이라고 할 수 있는 <1987>의 등장인물들이 일정한 목표, 소실점을 향해  점차 모여서 달려가는 느낌이라면, <바빌론>은 등장인물들이 중심점을 두고 동심원을 그리는 느낌이다. 이렇게 여러 등장인물을 흩뿌려놓다시피하면서 집중력 있는 연출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2. “부적응”에 대한 담담한 시선

    “어떤 변화에 적응한다”는 문장은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듯하다. 능력이 좋고 수완이 뛰어난 사람은 세상의 변화에 뒤쳐지지 않고 그야말로 “적응”하여 자신의 일을 해낸다. 이런 사람은 쉽게 존경과 시기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세상의 변화에 휩쓸려 자신의 일과 생업, 자존감을 모두 잃어버리는 사람은 “적응”에 실패하여 도태된 사람으로 쉽게 평가된다. 다가오는 변화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을 일종의 죄인처럼 여기게 한다.

    그런데 개인 입장에서 보면 시대 변화는 대단히 우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다. 아무리 위인, 영웅이라도 시대 변화를 예측하고, 나아가 의도하기는 어려우며, 적응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서 보통 우리가 느끼는 시대 변화의 “트리거”는 돌이켜 역사적으로 평가해보면, 시대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끝을 알리는 신호일 때가 많다. 그리고 이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변화는 우리가 변화를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적응하든 부적응하든 상관없이 몰아닥친다. 어쨌든 변화는 계속 진행된다.

    등장인물 가운데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낸 인물은 잭이다. 잭은 이 변화에 적응하려고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발버둥치지만 말투가 우스꽝스럽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적응에 실패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잭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바빌론>은 이러한 잭을 비웃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잭을 대체하는 새로운 세대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클리셰처럼 건방진 후배가 잭을 비웃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잭은 오래된 스태프들과 함께 사라질 뿐이다.

    <바빌론>은 이러한 잭의 모습을 영화 매체가 발전해온 역사와 대비하여 보여준다. 비록 <매트릭스>, <아바타> 등 기술 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사 요약 장면(<시네마천국> 오마주 아닐까)은 너무 메세지가 노골적이라 다소 오그라들긴 했지만, 나는 이처럼 변화한 것들로부터 도태된 사람들을 담담하게 아울러 묘사하려는 이 영화의 시선과 태도가 마음에 든다.

    누구도 새로운 시대에 뒤쳐지고 싶어서 뒤쳐지는 것이 아니며, 누구나 어느 때가 되면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뒤쳐진 사람들을 가혹하게 평가한다고 해서 새로운 시대의 가치와 의미가 부각되지는 않는다는 것. 이것이 내가 읽은 <바빌론>의 메세지이며, 이러한 시선과 태도는 역사서술에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3. 변화를 다루는 작품의 연속성

    발음과 표기가 어려운 감독, 데미언 셔젤은 꾸준히 “사람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변화”를 맞이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위플레쉬>에서 주인공은 미친 훈련과정과 예술에 대한 집념때문에 독종으로 변한 뒤 다시는 원래 자기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라라랜드>에서 서로 꿈을 쫓다가 변해버린 주인공 두 사람의 관계는 현실에서 결코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퍼스트맨>은 아직 보지 않았지만 달착륙과 관련한 영화라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처럼 영화 외적으로는 감독의 일관된 관심, 연출 방식을 찾아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본 영화였는데 아주 재밌었다.  영화 제목 값을 할만큼 음악도 훌륭했다. 역사학 역시 변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이 이어지는 영화였다. 감독의 어머니가 역사학 교수라고 하는 말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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